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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7)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07-14 (화) 17:37 3년전 807  

본문) 계 21:1-7, 사65:17-25, 눅13:22-30

 

오늘은 강림 후 일곱째 주일이다. 유독 날씨가 제법 사납다. 이웃인 일본과 중국은 재앙(災殃)수준의 폭우를 만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런 기운들이 우리 한국 땅에도 순간순간 넘나들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기나 날씨 변화로 인한 참사들은, 하늘로부터 내린 것이라서 그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못한 체, 마치 운명처럼 받으며 속수무책 당하고 마는 특징을 보인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의 위력(?)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음을 확인해 준다.

 

이런 때에 서울시장 박원순이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다. 국민에게 큰 아픔을 안기고 떠났다.  그도 다윗이 가졌던 성적 취약성을 드러내면서, 그 책임의 무거움을 그렇게 받아드렸다고 보인다. 가슴 아프다. 그럼에도 그가 평소 우리에게 보여 준 공인으로서의 참신한 모습들은 여운이 크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진영의 아이콘’이라고 불릴 만큼 신선하고도 차원 높은 정책들을 계속 개발하면서,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까지 크게 제고해 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인권변호사로, 시민사회운동가로,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항상 낮은 자, 고통하는 자, 그늘진 곳, 빼앗긴 자리, 차별받는 이들, 불의의 항거하는 자리에서 늘 같이 있었다, 특히 세월호 억울한 피해자들의 그늘이 되어 준 일, 광화문의 촛불혁명을 통하여 평화적 정권교제를 도모하도록 밑받침한 일들, 그리고 코로나 피해로부터 시민안전을 위해 과감한 행정들을 펼친 일들 등등은 그가 얼마나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는 특히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집념이 컸다. 만년 ‘드림(Dream) 보이’였다! 그런 곳을 이루려고 전력했고, 찾아다녔으며, 도전적인 실험들을 계속해왔다. 그러다가 그가 떠났다. 그러면 그는 끝난 걸까? 물론 인간으로서는 끝났다. 하지만 그는 꿈꾸는 자에게 열리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매가 무엇인지에 대한 메시지만은 강하게 남겼다. 즉 현실적인 불의와 모순된 세상을 넘어설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래도 그 꿈을 꾸며 도전하는 이들의 몫임을 잘 보여주었다

 

마침 강림 후 일곱째 주일인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의 시선(視線)을 이 땅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을 향하도록 이끈다. 복음서는 그곳을 ‘하나님의 나라’와 ‘좁은 문’으로 말하고(28-29절), 서신서에서는 그곳을 ‘새 하늘과 새 땅’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장막’으로 말했으며(1-3절), 구약의 예언서에서도 그곳을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으로 각각 말했다(17-18절). 이런 지시는 이 땅과 한정된 세상에 몰입해 있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또 다른 세상을 보게 하신 내용이어서,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하늘과 땅 창조(bara)는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에덴동산으로 지칭하는 지상(地上/earth) 창조가 전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창조인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천상(天上/heaven)에서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은 이사야 예언에서 밝혀진 사실이다(17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17절,상). 

 

그렇다면, 이 두 창조들의 차이가 무엇일까? 왜 새로운 창조가 필요했을까? 내용을 검토하면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첫 창조인 땅의 창조는 매우 불완전하고 후회스러운 것이었다. 처음 의도와는 달리, 첫 창조 에덴은 타락과 추방으로부터 시작하였고, 바벨탑으로 이어지는 반신적(反神的)인 세상으로 확대되면서, 구원보다는 심판을 받아야할 현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기에, 온 세상 만물과 생명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으로서는 노아 가족처럼 당신이 꼭 살려내야 할 ‘남은 자’ 같은 존재들을 위한 출구를 반드시 대비하셔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언급되는 창조’로 보인다(사65:17). 완전한 구원을 맛보게 할 성격의 창조였다. 여기에도 궁금증은 있다. 새 하늘 새 땅은 처음 것들이 실패하였기에 그 대체재(代替財)로서 창조된 곳인가, 아니면 본래부터 창조되어 보전되어온 현장이었는데-, 처음 것에 소망이 끊기니까 비로소 완전한 본체(本體)를 그렇게 공개하신 것인가란 점이다. 

 

이 부분은 분명히 신학적 논쟁(論爭)은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후자(後者)가 더 상식적이다. 그곳은 본래 삼위일체 하나님이 현존하신 거룩한 곳(성) 자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연약한 인간들을 위한 구원의 출구로서, 그곳을 비로소 뒤늦게 밝혔을 뿐이다. ‘새 하늘 새 땅’이란 말은 뒤늦게 사용해도, 낡은 인간들에게는 여전히 신선한 표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계시록의 요한이 ‘하늘나라에서는 땅에서 보았던 천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새로운 것(천지)만 보였다는 증언도 바로 그 연유 때문이었으리라고 본다(1절). 

 

하지만 보다 중요한 관심사는 창조된 그 장소가 땅(지상)에가 아니라 하늘(heaven)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왜일까? 그곳은 인간들이 중심된 이 세상으로서는 여전히 한계와 모순을 피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함을 행사하실 수 있는 곳이 그의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명심하자. 하나님은 절대 땅의 인간들에게 자신의 노력에 의한 구원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본래 영원성은 곧 거룩성과 온전성이 담보되어야 하는데, 인간들은 본질상 탐욕과 배타심과 이기적인 체질을 보유하고 있기에, 인간 스스로에 의한 구원은 허용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모르는 체 자기 구원을 추구해 왔다. 성서의 바벨탑 문화를 필두로 하여, 중국의 진시왕의 불로초 찾기, 토마스 모어가 꿈꾼 유토피아(이상향)란 허황된 꿈들 추구, 물질 만능이 가득한 요즈음에는 냉동수정체 내지 냉동체로 자신의 생을 연장하려하거나, 또 우주개발 등등으로 영원을 소유하고자 애들 쓰고 있다. 우상숭배 제작이나 그 경배 행위들도 역시 그 몸부림의 일환들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안타까움은 바로 거기에 있다. 왜 피조물인 인간들은 그런 반신(反神)적인 행동으로 조물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활짝 열어놓으신 구원과 영생의 문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려는가? 하지만 창조주께서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열고 있는 인간들을 향해서는, 영원한 새 문이 열려 있음을 알려주셨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기 시작한 것이다(사65: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요14:2)을 언급하신 것도 그 일환이다. 

 

그러면 이어지는 질문들이 있다. 곧 옛 것과 새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땅의 것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희망은 있는 것인가? 새 것의 맛을 보려면 인간이 취할 행동은 무엇인가? 하늘로 올라가야만(이 세상을 떠나야만) 해결될 문제인가, 아니면 땅에서도(살아서도) 가능한 것인가? 두루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선교 시대 이후(복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 자들을 위한)를 여신 성령의 새로운 지평(地平)이기도 하다. 다음과 같이 그 세계를 정리해 본다. 

 

1) ‘새 하늘과 새 땅‘의 특징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것, 즉 이전(以前)의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완벽히 잊게 하는 데 있다. 그 자료들인 서신서에서는 ’새 것을 보니-, 처음 것이 없어졌고 다시 있지 않게 완전히 사라졌다‘고 증언한다(계21:1). 새 것은 처음 것들인 슬픔과 아픔의 눈물이 씻김 받고, 사망도 없으며, 애통이나 곡(哭)하는 것이나 아픈 것도 사라진 곳이다. 

 

그곳의 긍정을 알리는 예언서에서도,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창조된 세계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이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이다(사65:17-18). 그곳 역시 억울함도 없고 절규도 없으며(19절) 차별도 없고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고 공생하며 평화를 누릴 곳이기 때문이다. 폭력이나 억압을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곳이기에, 해함이나 상함이 전무한 곳이기 때문이다(65:25절). 온전한 샬롬의 세상이 약속되어 있다! 

 

2) 그 놀라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늘의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 나라는 하늘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연성(柔軟性)을 가진 신비로운 권세로 이 낮은 곳, 이 갈등과 모순으로 탄식하고 대결하며 사는 이 거친 곳으로 내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모든 생명들에게 당신을 접할 수 있도록 기회도 제공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니’(2절)란 표현은 세상과 인간에 사랑과 관심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장막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면서 그 실체를 드러내었다는 증언도 은혜롭다. 그 바람에 인간 세상은 수직적(垂直的)으로 임하시는 하늘의 은혜의 선물을 거져 받게 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인간들만의 인지력이나 판단력만으로 구원과 영원을 맛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만물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계21:2,5)만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할 뿐이었다. 

 

3)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의 선물인 새 하늘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거룩한 장막이 보이게 강림하였다면(2-3절), 그 실체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둘로 보인다. 

 

첫째는 하나님의 친 아들이자 첫 번째 보혜사(保惠師)로 이 땅에 성육(成肉)하신 나사렛 예수의 오심이다. 그는 진짜 임마누엘(Immanuel)로 오신 하나님이셨다(마1:23참조). 그가 오심으로서, 세상은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분임을 알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점을 요한이 하늘나라에 가서, 직접 확인한 것이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계21:3절)라고 하신 증언도 바로 그 맥락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이자 아들 예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의 강림하심이다(행2장 이하). 성령의 오심으로 지구촌은 교회란 예수 공동체를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맛보기 시작했고, 이전의 낡은 것들이 사라지는 체험들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멀리서 찾던 생활을 청산하고 내 안에 영으로 오셔서, 눈물을 씻겨주시고 세상의 고단함에서도 해방시키고 자유하게 하시는 존재 혁명의 새 시대와 새 인물됨, 즉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4) 이 세상 갱신(更新)과 변혁(變革)의 시작은 땅 스스로에서부터가 불가능하기에,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의 하늘 파트너들인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을 이 세상에 연이어 파송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이 새 세계를 열고 맛보며 전하다가 진짜 본체의 나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들은 누구나 예수를 영접해야만 하고(요1:12), 그가 보내신 보혜사 성령도 받아야만 한다(엡5:18). 

 

5) 남은 과제는 무엇인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에서부터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을 사모하는 마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영접하는 일이다(요1:12-13). 그래서 내 안과 내 삶의 현장을 지배해왔던 처음 것들의 어두움에서 벗어나는 결단을 하는 일이다. 

 

지금껏 내 주인처럼 행세해 온 세상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것들을 잠시 생각해 보라, 그것들이 지금껏 우리에게 안겨 주었던 것이 무엇이었나? 이사야는 그것들을 이렇게 고발한다. 인간 세상에서 ‘해함(harm)’과 ‘상함(destroy)’이란 망가진 모습으로 살아왔음을 지적한다(25절). 서신서는 우리가 슬픔의 눈물, 죽음의 위협, 억울함에 애통하는 일, 각종 상처에 아파하는 일 같은 것으로 우리의 일상이 짓눌려 왔음도 지적한다(4절). 

 

그런데 그런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들은 창조주께서 전혀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기에, 무척 아파하시면서 이제는 그것들을 우리 삶에서 깨끗하게 제거하여 주시고 보상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계21:3-4). 하나님이 원하시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지상적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사65:19-25절을 통해서 확인해 보라! 오직 예수와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6) 이런 하나님의 복음과 약속은 틀림없다. 그러기에 남은 일은 하나님의 그러한 선하신 뜻에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주님의 손을 잡아 드리는 일이다(hand in hand). 마치 창28장의 벧엘에서의 야곱과 같은 모습, 즉 먼저 축복의 손을 내밀어주신 여호와께 야곱이 서원을 드리며 응답하던 그 모습이 지금 우리들에게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게 실천해주시도록,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실천해 가야 하는 일이다. 

 

이제 본문들에서 제시된 우리의 행동 지침들을 결론(結論)삼아 정리해 본다 :

 

☞ ‘내가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리라’.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相續-하나님의 아들됨/신적 존재)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자녀)이 되리라’(계21:6-7).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24). 그 나라는 참으로 귀한 나라이다. 당연히 방해거리인 시험과 유혹들도 많다. 견디고 이겨내려는 치열하고도 진지한 노력 없이, 그 나라를 취하려는 일은 그 자체가 허황된 태도이다. 진심을 다한 뜨거운 노력이 있어야 한다! 

 

☞ 깨어 있어야 한다(눅13:25-27절). 그 나라는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탈락하는 자들이 많다. 주인의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종이나 구경꾼의 모습이나 자세로는 안 된다. 그 나라는 게으른 자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동서남북으로부터 그 나라에 참여하고자 몰려드는 자들이 많다. 하나님의 나라를 앞에 두고 게으른 짓을 하는 것 자체가 행악(行惡)이다(27절). 

 

☞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살도록 전력을 다하자(사65:18-19절). 그런 자가 되면, 하나님의 돌보심은 이 땅에서는 물론 영원에 이르기까지 응답을 받아서, 샬롬을 기리 누리게 된다(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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