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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4)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20-06-23 (화) 18:56 3년전 853  

본문) 행 16:6-15, 욘 3:1-4, 마 28:16-20

 

오늘은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넷째 주일이다. 여름 무더위도 본격화되었다. 코로나19의 위협마저 가중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현장 교회들이 각종 다양한 행사들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음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것은 봄 정기노회에서 교회들이 소속 노회에 올린 각종 청원 사항들이 노회의 허락을 받음으로서 가능해진 것들이다. 뿐만 아니다. 이런 일련의 교회 공동체가 전개하는 행사들은 교회의 원 설립자이신 성령의 적극적인 활동이 우리 안에서도 여전함을 확인시켜 준 일이기도 하기에, 그 의미가 크다. 

 

대체 어떤 일들인가? 교회를 창립하거나 설립하는 일, 교회의 다양한 현황을 보고 받은 일, 목사를 임직하고 파송하며 각종 역할을 부여하는 일, 목사후보생을 관리하는 일,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보고를 듣고 격려하는 일, 해외 교회와의 연대를 위한 행사들을 진행하는 일, 노회 재산과 선교 상황을 관리하는 일, 상회 기관인 총회(總會)의 위임 사항을 결정짓는 일, 그리고 개 교회에서의 중직(重職)들인 장로와 권사 또는 안수집사를 임직시키는 일들 등등을 말한다. 

 

이런 교회의 일련의 행사들이 이 강림절기에 펼쳐지고 있음은, 그 행사 자체가 지극히 성서적임을 입증한 것이다. 본래 성령은 교회의 영이며, 선교의 영이고, 공동체를 세우고 이끄시는 영이 아니신가! 비록 통계상의 집계는 없었으나, 아마도 상당히 많은 교회의 창립일이 이 이 강림절기에 속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만큼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동적 활동이 이 절기에 집중된 면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이 강림절은 교회와 선교와 신도를 위한 절기이다.

 

따라서 건강한 교회들은 이런 강림절기를 지혜롭게 활용하여, 교회 공동체를 보다 역동적으로 올려 세워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에 관련된 신앙적 모순들을 바로잡는 일에도 관심해야 하겠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만큼,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量産)하는 시대를 열어야 하겠다. 더 이상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에는, 비양심적이고 불량한 행동을 하는 자들을 찾아볼 수 없는 교회를 이루어야 하겠다. 지난 주일에 받았던 말씀대로, ‘진리와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이 모인 교회’를 반드시 이루자는 것이다(슥8:19하).

 

이 일들이 가능하려면, 내 신앙의 중심에 ‘예수가 진리이시고 예수가 온 세상의 참 평화(화평)’(엡2:14-18)이심을 확고히 믿고, 그 내용을 주변과 온 누리에 계속 선포하며 사는 선교(宣敎的)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삶이 선교적인 삶(missional life)일까? 그를 위하여 우리는 본문의 증언들을 다시 주목해야 하겠다. 마침 오늘 세 본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앞세워 당신의 구원의 뜻을 온 누리에 다양하게 펼치시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소위 ‘위대한 명령’(The Great Commission)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복음서는 성자 예수께서 제자들 모두를 향하여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신 선교 총론적인 내용이고, 서신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바울 일행을 아시아가 아닌 유럽이란 미지의 세계로 파송하신 내용을 담고 있으며,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를 파송하여 앗수르 제국과 같은 이스라엘의 적성(敵性)국가의 백성들까지도 구원해내려고 일하시는 장면들을 다채롭게 소개한다. 

 

이는 우리 교회의 제반 선교의 활동에 대한 점검과 지침을 제시한 것으로서, 우리는 이런 성서의 증언들을 통하여 우리 교회들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성찰(省察)을 하게 한다. 또한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 앞서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펼치시면서 우리를 선교의 장으로 이끄는 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그 선교의 범위(範圍)와 영역(領域)에 대하여서도 우리가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갖고 대응해야하는 지를 재발견(再發見)하게 하신다고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묻고 가자. 대체 삼위일체 하나님은 왜 당신의 백성들을 그토록 선교적 인생(人生)과 관심자(關心者)들로 세우시려는 것일까? 분명 그 길은 불편한 인생과 희생적 삶을 요구하는 것인데, 어떤 연유로 우리를 그토록 선교적 존재들로 세우시려고 하시는 걸까? 크게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온 세상 만민을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마음 때문이다. 그러면서 온 세상 만민들을 예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극복하면서 그것도 이웃까지도 살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향유하고 나누며 살게 하시려는 까닭이다. 

 

어디 그뿐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러한 선교적 삶에 대한 요청은, 우리를 자기만 아는 ‘좁은 사람’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상대하는 ‘큰 사람으로 세우고자 하심’에 있다. 자기 개인의 아집에서 벗어나서 모두와 전체를 끌어안은 존재가 되어 일생을 높은 가치를 붙들고 씨름하는 존재, 선한 고민과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는 존재로, 당신의 자녀들을 차원높이 세워주시고자 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깊은 뜻 때문이 분명하다. 받은 자들은 이미 이 점을 다 안다!

 

복음서를 보자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 전체를 부르셨다. 마지막 유훈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짧고 간결하지만, 제자들 평생의 운명을 결정짓는 말씀이었고, 지구촌의 운명을 방향 짓는 내용이었다. 그 때의 말씀이 2,000년 이후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들의 삶과 운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면 볼수록, 주님의 이 말씀은 과연 ‘지상(至上) 명령’이었다. 감사한 것은 그 명령에 전 생애를 바쳐서 순복(順服)한 그의 제자들이다. 진정 자랑스러운 이들이다!

 

1)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주님을 뵙기 위해 찾아간 곳은 갈릴리의 어느 산이었다(16절). 갈릴리는 기독교 복음의 출산지(出産地)이다. 유대의 땅이면서도 성격상으로는 이방적 요소가 짙게 드리워 있던 땅이 바로 그곳이었다. 에큐메니칼 성격에 처음부터 배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곳을 주 무대로 예수와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활발하게 펼치셨다. 이 점은 우리 교회들에게도 항상 거룩한 부담을 준다. 교회와 성도에게는 항상 갈릴리란 영적 영역을 거점삼아야 되기 때문이다. 갈릴리를 잊은 교회와 성도의 삶이란, 공허한 신앙 팔이(?)에 빠지게 된다. 

 

2) 그 산의 이름은 분명치 않다. 하지만 주님의 산상수훈이 펼쳐진 바로 그곳이 아닐까 싶다(마5-7장 참조). 그 갈릴리엔 말씀과 기적과 교류와 생명의 영이 흐르는 곳이었다. 

 

3) 주님이 당신의 정체에 대하여 확실히 밝히셨다(18절). 제자들은 분명히 주님을 알고 믿어야만 주님의 미션을 수행할 수 있었다. 물론 제자들 전체가 확실한 믿음을 보유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주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생명과 구원 역사의 물결이 그곳 갈릴리에서 온 세상 끝으로 흐르기 시작한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음을 모두가 잘 알았기 때문이다(17절)

 

4) 주님의 자기 소명(疏明)에 의하면, 주님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All authority)를 부여받으셨다(18절). 아들로서의 전권과, 인자(人子)로서의 전권을 부여 받으셨음을 밝히시면서, 바로 그 영향력으로 온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그 하늘 권위를 담보로 제자들에게 특별 명령을 내리셨다. 제자들이 수행할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 것들이었다.

 

①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이다(19,상) - 가서, 처처에 ‘예수 닮은 자들’을 만들어라! 

☞ 이는 현지로 찾아가, 거기서 갈릴리 영성을 가진 자들을 거점(據點)으로 심으라고 하셨다.

② 세례(洗禮)를 베풀 되,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해야만 했다(19.하). 

☞ 삼위 중 하나가 아닌 통전적 하나님의 이름과 영을 받은 자들을 생산할 세례가 돼야 한다.

③ 주께서 그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행(行)하게 하는 일이다(20.상) 

☞ 말씀에 대한 교육(敎育)과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선교(宣敎)적 존재가 되게하라.

 

5) 주님이 확실한 약속을 주셨다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절). 

☞ 이 약속이 누구에게 유효한가? 갈릴리의 복음을 듣고, 분부를 지켜 행할 제자들이다.

 

서신서를 보자

찾아가는 선교(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가 본격화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가, 누구를 찾을까 하는 문제는 원칙적으로 성령이 하신다. 물론 인간들의 노력이 허용은 되지만, 그러나 최종 결정은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된다. 그 모델이 오늘 서신서의 내용이다. 결국 세계 선교의 밑그림의 주역은 전적으로 삼위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1) 의사인 누가는 이 대목에서 인간중심의 선교가 성공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하려고 한다. 선교사 바울 일행이 아시아(터어키 수도인 앙카라 일대)와 부르기아 갈라디아 무시아 그리고 비두니아 등등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추진하였는데-, 결국은 계속되는 외적인 난관들에 부딪쳐 포기하게 된다. 누가는 이 상황을 성령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규정하였다(6-7절참조). 

 

2) 그러면 이 난감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나? 그것도 성령의 지시(指示) 때문 이었다! 그들이 항구도시이자 에게 해(海)로 통하는 드로아로 내려갔을 때, 밤에 바울이 한 환상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그리스의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바울에게 요청하였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9절). 그 체험으로 답을 얻은 바울 일행은 힘써 드로아(트로이 목마로 알려진 곳)를 떠나, 그리스의 항구 도시 네압볼리에 도착하고 이어서 빌립보에 이르게 된다.

 

3) 성령이 인도하시는 기독교의 해외 선교가 아시아가 아닌 유럽 대륙을 향하고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장면이다. 즉 유럽 선교의 관문이 그곳 빌립보에서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곳에서 바울 일행은 몇 일간을 유하면서 선교에 임하게 된다. 그러면 빌립보는 어떤 곳이었나? 그리스의 북부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로마의 식민지였다(12절).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퇴역 군인과 그의 가족들의 휴양지를 한적하고 산수 좋은 그곳 빌립보로 정하고 있었다. 

 

4) 그 흐름 때문에 그곳 빌립보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비(非)유대교적 색체가 강하였다. 실로 전도자들에게는 접근이 불편한 곳이었다. 평소 그들은 가는 곳마다 유대교 회당(會堂)이 있어서, 그곳을 거점삼아 전도하였는데-, 이곳 빌립보는 그게 없었다. 유대교 회당 모임은 최소 남자가 10명 이상이 출석해야 회당 모임이 가능한데, 빌립보는 그렇지 못했다. 다만 흐르는 강가에 기도처소가 있어서 그곳을 찾아가야 했다. 그곳에는 일련의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13절). 

 

5) 오늘의 말씀은 바로 그 여인들 속에서 성령이 <하나님이 선교>의 일을 행하셨음을 전한다. 바로 루디아란 여인을 그곳에 특별히 준비시켜 두셨기 때문이다. 기독교 선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여인이 된 루디아는 어떤 인물이었나? 

☞ 두아디라(지금의 터키 리디아지방) 출신으로서 자색(紫色)직물산업을 경영한 독신녀 사업가로 보인다. 호사품목을 거래하면서 돈벌이가 되는 무역업을 한 부요한 기업가 여인이었다. 게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바울 일행을 만나게 되면서 그들의 증언한 말씀에 마음을 열면서 따르게 되었다(14절). 성령이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음이다.

 

6) 믿음의 응답은 정말 뜨거웠다. 전 가족이 다 함께 그곳의 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집을 활짝 공개하면서 자기 집을 선교사들의 유숙(留宿)처로 강권하며 제공하였다(15절). 앞의 복음서에서 주님이 분부하신 명령이 지금 빌립보의 루디아 가정에서 성취되고 있었다. 루디아의 이런 과감한 모습은 옛날 고대 대가족들이 생활-생업-종교공동체로 하나 되어 움직일 때에는 결코 낯선 일이 아니었다. 집 주인의 행위는 전 가족으로 자연스럽게 직결되었다. 고넬료의 가정에서도 그렇게 했었다(10:2참조). 곧 그녀의 집이 유럽선교의 거점이 된 것이다!!

 

구약을 보자

이번에는 선교사가 어디를 가게 되는가? 성부께서 요나를 보내신 곳은 바로 이스라엘의 최대 적성(敵性)국가인 니느웨였다. 니느웨는 어느 나라였나? 기원전 8세기 말부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존재와 신앙을 계속 위협해 온 앗수르 제국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원수 같은 곳을 ‘아예 딱 찍어서’ 요나를 선교사로 보내셨다. 그것도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4절)라는 짧고 멋없는 외마디만을 선포하도록 보내셨다(1-4절). 

 

게다가 요나의 니느웨 선교는 하나님의 반(半)강제적 명령 때문이었다. 처음 명령에는 아예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붙들리는 바람에 죽을 고생한 후에, 다시 재 파송 명령을 받은 것이었다. 결국 피할 수 없음을 안 요나는 정말 성의 없이 외치고 끝냈다. 사흘 길거리(60-80Km)되는 길을 하루 동안의 외침만으로 끝내고 말았다(3-4절). 

☞ 하지만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즉시 금식과 함께 회개하며 엎드렸다(5-6절). 그것도 사람은 물론 가축들까지도 금식하며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악행에서도 떠났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고 나온 것이다(7-9절). 

 

이런 모습은 친 백성 이스라엘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 어찌 이방인에게서, 그것도 제국 앗수르에서 이런 대변혁이 가능했을까? 역사와 온 세상의 주이신 여호와께서 그들 앞서서, 자비의 손길을 펼치셨기 때문이다. 원수 같은 이방세력까지도 구원해내시려는 여호와의 마음을 전하려는 까닭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도 아버지의 그 마음에서 나온 것 아닌가! 그렇다. 오직 하나님은 죄인들이 잘못된 길에서 돌아와, 목숨을 보존하기만을 깊이 관심하신다(겔33:11,렘18:8참조). 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북녘 땅에서도 선한 일을 행하시리라 믿는다!

 

결론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제자들이다. ‘가서 모든 이들을 제자 삼으라’는 준엄한 명령을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반드시 응답해야만 한다. 나 때문에 예수 믿는(닮은) 사람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 세례도 받게 해야 하고, 세상을 바꿀 새 생명들이 태어나게 해야 한다.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심과 성령이 내 앞서서 일하시는 모습에도 눈이 밝아져야 한다. 결코 나만을 위해 살려하지 말자. 반드시 내 자신이 늘 성령과 동행하는 선교인(人)이 되고, 선교적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내 평생이 선교의 열매로 가득한 생애가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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