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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3)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민족화해주일

관리자 2020-06-16 (화) 22:27 3년전 816  

본문)  행 11:1-18, 막 7:24-30, 슥 8:18-23

 

오늘은 성령강림 후 셋째주일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오늘 주일을 70년 전에 발생했던 6.25전쟁의 참상(慘狀)을 기억하며, 더 이상의 민족 전쟁을 막고 ‘화해(和解)와 평화(平和)로 뭉쳐진 한 민족 되기’를 기원하는 민족화해주일로 지킨다. 

 

때마침 최근 북한 당국의 대남 강경선언과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로 인해 남북한의 관계가 또 다시 안개 속으로 빠져든 입장이어서, 오늘 우리의 예배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할 수밖에 없다. 2년 전에 있었던 6.15남북정상 간의 판문점 평화공동선언이 지금 휴지장이 될 처지에 있고, 또 어떤 유형의 남북 군사충돌로 한반도가 다시 격랑의 폭풍 속으로 빠져들지 몰라서-, 우리의 염려가 높아지고 있다. 진정 ‘평화 없는 안정은 허구’라는 사실을 또 다시 절감한다. 

 

상황은 좋지 않다. 이 일의 빌미는 탈북민들의 전단 살포 사건과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우리 측의 아쉬운 태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미국의 완고한 북한 제재와 그것에 자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끌려 다닌 우리에 대한 북한의 불신이 아닐까? 북한 역시 이런저런 악재들로 매우 어려운 처지인 것은 분명하다. 그들의 공격 속에는, 자신들의 고통을 남쪽이라도 나서서 ‘해결해 달라’는 외침도 담겨 있다고 보인다. 

 

대단한 지혜와 담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이 간극을 막을 수 있으며, 어떻게 서로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최상위(最上位) 방안은 분명하다. 우리 남북이 이럴 때일수록, 서로 싸우지 말고 만나고 소통하여, 함께 번영할 길로 함께 찾는 것이다. 양측이 이제라도 담대하게 서로 만나, 그것을 붙잡고 그것으로 승부하도록 마음을 모으는 일이다. 우리 교회들도 그 최상의 선택의 길이, 미국이 아닌 남북 공동의 노력으로, 다시 열리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특히 지금 우리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모습에 주목하고 있는 때를 보낸다. 궁금하다. 지금 이 난국에서 만날 성령 하나님은 과연 어디에 계실까? 여러분은 오늘의 세 본문 말씀들 속에서, 성령이 어디에서 무엇을 행하신다고 보는가? 오늘 우리 한반도와 교회 문제의 답과 출구를 찾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오늘에 주신 말씀들이 지시하는 손가락의 방향을 주목해야 하겠다. 

 

이 말씀의 이해를 위하여, 우리는 다시 주목해야 한다.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온 세상에 펼치시기 위하여 맨 처음에 불러 세우신 아브라함의 독보적인 위치와 그로 인하여 온 세상 족속들이 받게 될 영향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살펴보는 일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에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12:2-3절)

 

여기에는 두 대상이 엉켜있다. 하나는 아브라함처럼 복이 되어 복을 전하고 끼치는 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그를 통하여 전달되는 여호와의 복을 받게 되는 무리들(족속)들이다. 이 둘은 하나님의 경륜과 구원의 은혜 속에서 서로 만나 영향을 주고받으며, 구원공동체로 하나가 된다. 바로 이런 흐름이 오늘 세 본문 전체의 틀을 이루고 있다. 

 

서신서에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베드로가 아브라함의 복을 끼치는 인물이다. 그를 자기 집에 초청한 이방인 고넬료는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되는 로마인이다.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복을 직접 수여하시는 분이며,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복을 매달려 받게 되는 헬라인이다. 구약 스가랴서에서는 해외에 흩어진 디아스포라(교포)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복을 전달하고 보여 주는 주역이며, 그들을 통하여 여호와께 돌아오는 구원의 복의 수혜자들은 여러 백성과 많은 나라들이다. 본문들은 이 두 계층의 역할들을 선명하게 대비(對比)해 준다. 

 

그러면 성령의 일하시는 곳은 어디일까? 물론 성령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 함께 하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세상 현장과 이방인에게도 친히 개입하셔서, 그들의 시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진리(眞理)와 의(義)를 찾도록 선제적(先制的)인 활동을 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런 성령의 선하신 작업이 없었다면, 이방인의 구원 자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르고 이끌어 줄 이가 없는 데, 어떻게 무지한 인간들이 거룩한 신에게 나올 수 있겠는가!

 

이 부분의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 교단의 선교정책의 핵심이기도 한 하나님의 선교를 간략(幹略)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파송될 인간에) 앞서서 일하시는 분이다’라는 신학(앙)적 입장이다. 

 

즉 하나님은 우매하고 한계가 분명한 인간들만 파송하시는 분이 아니다. 보내실 때에는 이미 당신의 사자들을 미리 파송하셔서, 그들의 선교가 되도록 사전 정지작업을 하시고 추수하게 하시는 선행 작업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 믿음과 그 확신으로, 파송자들은 미지의 세계와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측면의 내용들을 우리는 성경 안에서 이미 숱하게 접해 왔다. 

 

예컨대, 예수 자신이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만나 하늘 아버지의 선제적 조치 속에서 당신의 선교가 놀랍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제자들에게 기쁨 속에서 언급하신 놀라운 증언들이 바로 하나님의 선교의 모범이다(요4:36-37절 참조). 그렇다. 선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개입과 선행적 활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모든 회의와 만남에도 선발대의 작업이 있어야 만남에 열매가 따르지 않던가!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사례들 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선교의 행위들이 얼마나 크게 선교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선교를 위하여 성령은 전할 자와 듣게 될 자 모두를, 품으시고 서로 통(通)하게 하신다. 성령은 교회 안에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아브라함의 축복의 반열에 참여할 자들을 찾아 모으시는 일들을 하신다. 성령이 외부인을 어떤 모습으로 터치하실까? 사람 속에 하나님이 원래부터 심어주셨던 영원(永遠)을 사모하는 마음(영혼)을 대상하신다(전3:11참조). 그 사모하는 겸손의 마음이 살아있으면 누구든지, 복음의 소리에 뜨겁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마5:13-14)라고 새 정체성을 부여하신 것도,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세상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자들로 세우시려는 하늘 아버지의 뜻 때문이었다. 소금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모인다. 빛도 마찬가지이다. 빛있는 곳에 생명들이 모이고 함께 존재한다. 이게 바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어야 할 이유이다. 

 

아브라함의 계열에 선 자들의 삶의 미션은 자신이 가진 소망과 생명의 가치를 상대에 보여주며 사는 데에 있다. 감당할 선교의 멍에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서 자신도 아브라함 후손으로 살기를 바라는 영혼들에게도 과제들이 있다. 겸손(謙遜)해야만 한다. 그리고 상대가 누리는 하나님의 복을 은혜(恩惠)로 알고 진실하게 구하여야만 한다. 겸손과 은혜구함이, 바로 이 두 진영의 높은 장벽을 허물고 서로를 하나 되게 하는 마스터키(Key)이다. 

 

서신서를 보자

로마 백부장인 이방인 고넬료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복음을 받고 성령까지 받으며 상호 식탁교제까지 나눔으로서 그들도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접되면서, 교회에는 율법의 완고한 이방인 접촉금지법의 장벽을 넘어서는 일이 발생하였다. 당시 처음교회는 율법 정신이 강한 유대인들이 주축이어서, 이방인 접촉은 여전히 위험하고 식탁교제나 삶의 접촉도 율법에 대한 중대한 위반으로 간주하였는데, 그 강고했던 장벽이 깨어졌다. 

 

1) 그런 파격(破格)적 사건이 발생한 연유에 대한 당사자인 베드로가 해명에 나섰다(1-17절). 

2) 그 사건은 처음부터 성령(聖靈)의 강력한 개입에 의한 것이었다. 베드로 자신의 증언을 요약하면 이렇다 :

① 그가 지중해변의 욥바(Joppa) 체류 시, 기도 중에 한 충격적인 환상(vision)을 보았는데, 그것은 하늘로부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리어 자기 앞에까지 드리워져서 그 안을 보니,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다(5-6절).

② 더 큰 충격은 자기에게 들리는 성령의 음성이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7절)

③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것은 내 입에 들어간 적이 없나이다’. 그러자 소리가 또 들렸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이런 대화가 무려 세 번이 계속된 후,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갔다(8-10절).

④ 그 환상 체험이 끝난 그 시간, 그는 가이샤라에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 로마 백부장이자 이방인 기피 대상인 고넬료의 초청장을 가진 자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⑤ 그 순간에 성령이 또 명령하셨다- ‘아무 의심 말고 가라’. 

그래서 증인될 6명의 형제들을 동행자로 삼아(10:45-47), 베드로가 그 초청에 응했다(12절). 

⑥ 알고 보니, 성령은 자기만 찾으신 것이 아니었다. 초청자인 고넬료에게도 나타나셔서, ‘시몬 베드로를 청하여 그와 그의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시었다(13-14절). 

☞ 그들에 앞서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그곳에서 펼쳐졌음을 확인한 것이다.

☞ 고넬료의 뜨거운 영접은 그가 얼마나 사모함으로 그를 맞이한 지를 확인해준다(10:33절)

⑦ 방문 후 말씀이 시작되자, 성령이 임하셨는데, 그 장면은 바로 오순절 때의 자기들 모습이었다(15절,2:1-4참조). 이방인들인 그들도 성령 세례라는 선물을 받는 순간이었다. 즉 성령께서 앞장서 이방인들을 자기들과 같은 반열에 영접해 주시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16-17절)

 

3) 베드로의 해명으로 무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동시에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음을 확인하였다. ‘성령의 땅 끝 선교’의 거보를 내딛는 순간이었다(18절). 생각해보라. 그때 성령세례 받았던 로마 장교인 고넬료 일행이 그 후 가는 곳마다 무엇을 했겠는가-!

 

복음서를 보자

성자 예수님께서 유대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접해 주셨는지, 이방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처럼 될 수 있는 지를 사례로 보여준 내용이다. 

 

1) 예수님은 이방인의 땅 두로의 한 집에서, 헬라인이자 수로보니게 족속인 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슬픈 여인이었는데, 예수께서 자기 마을에 와 계심을 듣고 찾아와 발아래 엎드려 간구하였다.- ‘내 딸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 주십시오’(24-26절). 

 

2) 주님은 일단 거부(拒否)하셨다. 그 이유는 자녀(유대인)의 떡은 먼저 자녀부터 배불리 먹게 해야 하고, 자녀 몫을 개들(이방인)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기 때문이라는 논리였다(27절). 

☞ 주님은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최초요 본격적인 대화 상대임을 인정하신 것이었다. 

 

3) 여인은 다음의 말 한마디로, 그 결과를 반전(反轉)시켰다. ‘주여 옳소이다만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로 먹습니다(28절). 그녀는 예수님의 거부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개들의 생존권도 그 주인이 지켜주는 것 아니냐는 호소를 한 것이다. ‘오직 자기들은 은혜(恩惠)로 먹고 산다’는 마음의 호소를 겸손(謙遜)하고 집요(執拗)하게 드린 것이다(슥8:21-23 참조). 

 

4) 주의 응답이 떨어졌다.-‘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29절).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의 사이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안 그를 영접하셨다. 

 

구약을 보자

여기에서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교포들(디아스포라)이 그 지역 이방인들에게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을 잘 보여줌으로서, 그들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기들도 유대인처럼 그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입고 사는 자들이 되고 싶어서, 예루살렘까지도 찾게 될 모습을 담았다. 

 

1) 그 놀라운 매력(魅力)의 핵심은 금식(禁食)과 같은 경건생활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라, 진리와 평화를 추구하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소금과 빛된 삶의 모습에서 나올 것임을 전했다(19절, 마5:13-14 참조). 본래 유대 교포들은 나라 잃고 세계로 흩어진 슬픈 백성들이었기에, 그들의 메시아 기다림은 대단했다. 포로 후에는 년 4차례 이상의 금식들에 더욱 힘썼다

 

2)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금식만으로는 기쁨을 드리지 못했다. 금식은 본래 자신들을 위한 것이며, 상황이 변하면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슥7:1-6참조). 그러기에 이웃에게 올바른 삶을 제시하고 더불어 사는 평화의 삶의 모습을 위해 헌신하는 일은 훨씬 더 가치가 높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 곳곳에 흘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기대치였다(19절 하). 

 

3) 그 결과가 예측되었다. 유대인에게서 차원 높은 삶의 수준과 그 축복을 엿보게 된 많은 백성들과 나라들이 유대인의 신인 여호와를 찾아 나온다. 주의 은혜를 자기들도 받고 싶어 한다. 그 일을 위하여 그들은 유대인의 옷자락을 잡으며 그 다리 역할을 요청한다(20-23절 참조). 마치 룻이 나오미의 옷자락을 붙들고 유대로 향한 내용과 흡사하고 그 일로 여호와의 넘치는 복을 받은 일과 흡사하다(룻3:9,겔16:8참조). 

☞ 스가랴의 이런 예언이 나중에 오순절에 성령의 음성을 들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를 찾게 된 온 세계 족속들과 나라들에게서 성취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도 포함해서 말이다. 

 

결론이다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할 때이다. 완고한 북한은 어떤 인간의 소리도 외면할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소리는 들을 수 있도록 간구하자. 우리도 안일했음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분단의 종식을 위해 우리 안에서 뿐만 아니라, 북한 안에서와 온 세계에서도 역사하실 보혜사 성령의 선하신 활동을 간절히 바라자. ‘오직 은혜’, ‘오직 자비’로서만, 남북의 평화와 공존 공생 공영의 시대가 열리리라는 믿음을 고백하며 역사의 주님께 뜨겁게 간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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