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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후(2)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총회선교주일

관리자 2020-06-09 (화) 14:55 3년전 929  

본문) 행9 : 1 – 19, 마9 : 35- 10:1, 렘1: 4-10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두 번째 주일이다. 교단 총회로서는 오늘 주일을 총회선교주일로 지킨다. 우리 교단이 매년 이 6월 둘째 주일을 총회선교주일로 지키는 까닭이 있다. 그것은 1953년 6월 10-11일 제38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란 새 장로교단이 당시의 기존의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떠나 정식으로 출범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의 출(出)애굽한 사건을 두고, 우리는 늘 ‘새 역사 00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올해 2020년은 새 역사 67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때의 <38회 호헌 총회 선언서> 내용을 소개한다. 왜 우리 교단이 한국교회 안에서의 새 역사를 시작하였는지가 잘 들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 선언의 핵심들 4가지는 다음과 같다 : 

1) 온갖 형태의 바리새주의를 배격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복음의 자유를 확보한다. 

2) 건전한 교리를 수립함과 동시에, 신앙 양심의 자유를 확보한다. 

3)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조 정신을 함양한다. 

4) 편협한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전 세계 성도들과 협력하려는 세계교회 정신(에큐메니칼) 정신에 철저하고자 한다. 

 

이런 총회 선언과 함께 시작된 우리 교단 총회는, 당시 한국교회적 상황으로 보면, 완전히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카톨릭 교회로부터 뛰쳐나와, 제95개조 항목을 토론의 주제를 내걸면서 새 역사인 개혁교회를 태동하였던 그 상황에 버금하는 일이었다. 아니 좀 더 올라가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독립하여 뛰쳐나온 형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일 때문에, 우리 교단 기장(基長=한국기독교장로회의 약칭)은 한국교회의 뜨거운 감자처럼 되고 말았다. 버릴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는 주목 받는 신앙집단이 된 것이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우리 기장이 기존 교회들과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는가? 성경을 보는 눈(시각)의 차이가 컸다. 기존 교회들은 문자주의에 얽매여 일점일획 그대로 믿자고 했으나, 우리는 그 말씀들은 당시의 시대 상황적인 배경을 안고 나온 것이기에, 그 배경과 뜻(마음)을 헤아려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이런 입장은 자연히 신학(神學)논쟁으로도 대립하게 되었다. 

 

기존의 정통주의 신학은 무조건 말씀을 문자대로 믿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붙들기 시작한 신(新)정통주의 신학은 인류가 발달시킨 과학적 이해, 철학적 사고, 지성적 접근, 정신분석학적 이해 등을 활용하면서, 그 말씀이 안고 있는 메시지를 통전해서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그 바람에 우리는 한국교회에서 진보(進步)신학 대변자가 되고 말았다. 보수측으로는 이단(異端)으로까지 공격받으며, ‘기장은 구원이 없는 교단’이라고 헛소리를 듣기도 해왔다. 

 

더 큰 차이가 있었다. 구원과 선교의 장에 대한 인식이 차이가 컸다. 세칭 보수교회에서는 오직 모이는 교회로 구원문제를 승부하였다. 그것도 제도교회를 위한 구원론이었다. 그 바람에 보수교회들은 교인들이 많이 모였다. 세상 현장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런 현상은 정교분리와 영육 간의 이론적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들 보수교회는 세상은 악한 곳이고, 육체는 부정한 것이니, 신앙은 신령한 생활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강조했고 개인 구원에만 집중하게 하였다. 그 바람에, 보수교회는 세상과 인간의 삶의 전 영역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는 상대적으로 무지하고 또 어두웠다. 그들의 절대적인 관심사는 세상 권력이나 경제가 자기들에게만 잘해주면, 무조건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지지한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의 악행에는 침묵하였다. 그 바람에 독재 권력과 그들이 한통속이 되어 가까이 지내기도 했다.  

 

그 잘못된 모습이 지난 선거에서 나타난 전 한기총 회장인 전광훈과 그의 극렬지지자들인 태극기 부대원들의 모습들이었다. 세상과 정치를 모르는 자들로 살아오다가, 갑자기 정치에 참여하려던 자들의 미숙한 모습들이 그렇게 엉망으로 나타났다. 그것도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몰면서 공격한 것이다. 이념들 자체에도 무지했던 결과에서 나온 거였다

 

하지만, 우리 기장은 달랐다. 모이는 교회 못잖게 흩어지는 교회도 중요했다. 교회도 중요하지만 세상도 더 중요했다.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권이 교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하신 인간의 전 영역에도 미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 평화, 생명이 온 누리에 충만한 것이 선교의 최상임을 확신하면서, 그것을 반하는 어떤 악의 행태에 대하여서는 언제나 ‘아니요’를 선포하고 맞서왔다. 그러기에 과거에는 독재정권의 탄압도 받았고, 민주세력들과는 언제나 연대하면서, 하나님의 선교가 이 땅 모든 영역에 가득하기를 기도해 왔다. 

 

최근에도 동성애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문자로 믿고 율법적이어서, 철저히 배타적이며 인과응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우리 기장은 복음적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교회의 치유와 돌봄이 필요한 이들로 보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으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남북관계도 기본적으로 우리는 한 민족. 한 핏줄로서 머잖아 하나 될 가족들로 보면서 화해와 포용성과 일치의 마음으로 접근해야 마땅하다고 보고 있다. 

 

여러분은 이 두 흐름 중, 어느 것이 성서적이며 누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가깝다고 생각이 되시는가? 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 기장의 출애굽 사건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사건과도 흡사한 일이었다고 믿는다. 성령께서 한국교회와 민족과 역사를 그리스도의 뜻에 맞게 세우시려고 그 전위대로 우리 교단을 낡은 교회들에서 출애굽하여 만들어 내셨다고 믿는다. 

 

그 바람에 우리 한신은 한국교회의 신학을 주도하며, 교회의 인물은 물론 한국현대사에 큰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장준하 선생, 문익환-문동환 목사, 김재준-송창근-박형규-강원용목사, 서남동-안병무 선생 등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지금 지난 30년간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로 씨름하다가 국회에 입성하여, 친일파들의 공세 속에서 국민적 관심사를 끌고 있는 윤미향 의원도 우리 한신의 가족이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이들 상당수가 지금 현 민주정부의 핵심에 넓게 포진되어 있다. 이런 ‘작지만 큰 교단’의 실상을 일찍이 잘 알고 있었던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남기신 말씀이 있었다. ‘한신대학교는 한국 대학교들 중에 가장 위대한 학교이다’(한겨레신문). 

 

특히 한반도의 화해시대, 민주주의의 발전, 교회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발전 등에 우리 교단의 선교적 기여가 컸다. 물론 우리 때문만은 아니지만, 민주화의 역사에 기여한 우리의 발자취는 막강하다. 내가 100회 교단 총회장으로 섬길 때, 예장 통합측 총회장님의 말씀을 기억한다. ‘우리가 무엇을 압니까, 기장이 앞장서면 우리가 뒤 따라 갔지요. 그러니까 기장이 잘해주셔야지요’. 함께 앞장서지 못한 야속함도 있으나, 책임의 부담이 컸던 증언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 기장은 한국 내에서의 규모는 중간쯤이다. 하지만 해외에 나가면, 세계교회들이 모두 한국교회와의 파트너십을 맺을 때, 우리 기장을 우선시한다. 사실상 기장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단이 되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도 지난 제10차 부산세계대회에서 우리 교단의 선교 지침인 <정의.평화,생명>이란 주제를 받아서, 세계대회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소명으로 주어진 특별한 역할에 대하여, 마음을 다해 순명(順命)하여야만 하겠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오늘 새 역사 67주년을 맞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시려는 것일까? 기본적으로는 우리 교단의 시작에 대한 증언과 마찬가지로, 삼위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일꾼들을 택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유대와 온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는 일들을 소개한다. 세계 선교의 성서적 기원(起源)을 증언한 것인데, 이것이 우리의 기원과 맥을 같이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성서적 선교 기원을 보다 더 확인해보자.

 

본문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의 특징은 당신의 부르심에 ‘아멘’만 하는 자들(제자들)은 물론, 사양하는 자(예레미야)와, 당신에게 아예 공격적인 자(사울)까지도 포함시켜서 다양한 인물군을 골고루 택하셨음을 보여주셨다. 진정 그의 깊은 뜻을 헤아릴 길이 없다. 게다가 하나님의 선택에는 인간의 조건이나 자격이나 역량은 아예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 채워주셨다. 이들은 다만 하나님의 그 도우심으로, 나라 안팎에서 크게 일하였다. 

 

서신서를 보자

사울(바울)이 성령으로 오신 예수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받는다. 그의 선택됨은 매우 특이하다. 예수의 사람들에 대한 광적 박해자였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급격한 변화를 받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게 되고, 그 때부터 예수를 온 세상에 전하는 선교자가 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세계 최고의 해외선교사가 탄생했고, 기독교 최고의 변증신학자가 나온다. 그의 등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으로서, 다음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1) 당시 다메섹에 살면서(3) 사울에 의해 체포당하게 될 성도들이 가진 별칭(別稱)들은, ‘주의 제자들’(1), 그 도(道)를 따라는 사람들‘(2),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14) 등이었다. 

2)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는 ‘하늘로부터 홀연히 빛으로 오신 이’였다(3절). 

3) 두려움에 떨며 땅에 엎드려진 그에게, 주님의 소리(음성)가(이) 들렸다(4-6절).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迫害)하느냐 ---.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 이 예수 체험에서 사울은 예수를 제자들과 그의 교회의 배후에서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로 만난다. 동시에 자신을 제자들과도 동일시(同一視)하시는 메시아로서도 만난다. 이 근거로 인하여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증언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교회론의 체계도 잡게 된다(롬12:4-5,고전6:15,10:16-17,12:12-13,엡1:22-23,골1:18,2:18-19참조). 

 

4) 그 바람에 눈뜬 소경이 된 사울은 다메섹의 직가(直街-동서로 관통한 대표적 거리)에 위치한 유다의 집에 3일간 머물게 되면서(11절), 금식(禁食)하고 기도(祈禱)하며 있었다(9절). 

 

5) 그를 찾아온 이는 주의 제자인 아나니아였다. 그는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이었는데(22:12참조), 환상 중에 그를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 그는 네가 찾아와서 자신에게 안수(按手)하여 다시 보게 할 것도 이미 보았다’는 음성을 전해 들었다(10-12절). 결국 주님은 두 개의 환상으로 사울과 아나니아를 만나게 하셨다.  

☞ 여기서 유대인 디아스포라 사울의 출신지인 다소(Tarsus)가 등장한다. 현재 터어키에 위치하고, 고대 헬레니즘 문화가 번창한 곳(21:39)이었다. 바울을 세계인으로 성장시킨 곳이었다. 

 

6) 사울은 방문한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으면서 눈에 낀 비늘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자, 그를 통해 물세례를 받으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17-18절). 

7) 거기에서 사울에 대한 주님의 계획이 명백히 드러난다(15-16절). 그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한 ‘주의 택한 그릇’이었다. 세계 선교의 큰 그릇이었다! 그 사역 때문에 그는 그 후로 끊임없이 고난들을 받게 될 인물임도 예고되었다!

 

복음서를 보자

바울과 달리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 12명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선택 받았다. 그들의 선교무대는 유대 본토였다. 주님은 그들을 통하여 유대인들이 참 아브라함의 자손 됨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들의 사역에 필요한 모든 권능과 지혜 등은 모두 주님이 친히 공급해주시고 채워주셨다. 주님이 친히 공급해 주신 능력들이 무엇이었나?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들이었다(10:1).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제자들은 스승 예수께서 펼치셨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들, 즉 가르치고- 천국복음 선포하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치유하는 사역들을 수행했다(9:35-38). 양무리를 찾는 목자의 심정과 추수꾼의 심정으로 그런 사역들을 감당하였다. 

 

예언서를 보자

이스라엘의 대 선지자 중의 하나인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던 그 때의 첫 모습을 전하여 준다. 하나님은 그를 모태(母胎)에서부터 알았고, 성별(聖別)하였으며, 여러 나라의 선지가로 택하여 세우셨음을 통보하신다(4-5,10절). 그가 상대한 유다 왕들은 다섯이나 되었고(요시야,여호와하스,여호와김,여호야긴,시드기야), 부딪친 제국들도 셋이나 되었다(앗수르-바벨론-애굽-기타 주변 국가들). 그만큼, 예레미야의 활동과 관계된 폭이 국내외를 포함하여 컸음을 말한다. 그의 선교와 선포의 폭이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의 사역의 폭을 합한 영역이었음을 알게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한 완강한 반역을 자행하는 백성들과 왕들, 그리고 그런 행태에 대하여 심판의 칼을 거두지 아니한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서 센드위치적 사역으로 늘 아픈 마음을 자주 토로하기도 한 눈물의 사람이었다(8:18-9:6,11:18-23,15:10-18,20:7-10,14-18 등등). 

 

후에 그리스도 교회는 이 예레미야를 예언자 나사렛 예수(마16:14참조)를 암시한다고 보았다. 그가 말했던 ‘새 언약’(23:5)도 이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것을 토대로 맺어진 것이었다(고전11:25,히7-10). 이런 길은 후에 제자들과 사도 바울도 감당해야할 길이었다. 어찌 그들만의 길이겠는가? 민족의 구원을 위해 부름 받은 우리 남은 자 집단인 기장의 길이 아닐까! 

 

결론이다

우리도 이제 눈을 떠야 한다.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은 내 구원과 평안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통하여 구원과 평화를 아직 누리지 못하고 어둠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고 탄식하는 모든 이들을 해방시키고 자유하게 하려는 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나의 나태와 안일한 선택은 후에 주님 앞에 설 때, 받을 것이 없는 빈손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를 부르신 분의 뜻을 분별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고난의 멍에도 피하지 말자. 오직 겸손으로 하나님의 귀하게 쓰심을 받는 그릇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교회와 총회를 통하여 선교에도 적극적인 동역자들이 되자.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를 주님은 복되게 채워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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