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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씨뿌림주일 / 총선주간

관리자 2020-04-08 (수) 19:03 3년전 991  

분문) 요 20:1~10, 출 15:13-21, 고전 15:20-28

 

오늘은 2020년도의 부활절 첫 주일이다. 미증유의 코로나의 위협에서 맞이하는 부활절기이다. 지금 지구촌에는 연일 수많은 생명들이 코로나의 독침을 받아 속수무책 죽어간다. 그러기에 오늘의 부활주일은 의미가 더욱 크다. 그것은 우리의 주 예수님은 부활로 사망을 이기셨기에, 이번의 살인자인 코로나도 그 분이 꺾어 주실 것이다. 승리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들은 분명히 큰 은혜를 입혀주실 것이다. 아무리 천하의 코로나일지도, 부활의 주님의 통제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결코 주님의 보호망과 고통하는 자들의 기도망은 스스로 뚫지 못할 것이다. 

 

또 있다. 오늘 주일은 본 교단이 정한 씨 뿌림 주일이기도하다. 한 해의 농사를 위해, 토양에 씨를 뿌리면서 창주주 하나님께 예배를 올린다. 예수의 부활과 토지에 씨 뿌림의 만남은 매우 흥미롭고 의미 또한 깊다. 씨 뿌림에는 ‘죽어서 산다’, ‘죽어야 변 한다’는 부활의 논리를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죽어서 사는 부활의 질서는 창조 질서의 기본에 속했음을 본다. 

 

하지만 뿌리는 것이 어찌 땅위의 씨앗들뿐인가? 세상에 건강한 질서와 법과 시스템을 세우고 정하는 일, 어떤 영역과 지역에 활동의 거점을 마련하는 일, 그리고 사람이나 종교를 심는 일들도 모두 씨 뿌림의 다양한 형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 구원과 살림을 위하여 하늘 선교사로 파송되어 오신 예수님이 일찍이 당신의 고난과 부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새롭다 -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農夫/gardener)라’(요15:1).

 

금주간(4.15)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제21대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총선거(總選)가 있다. 국민들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나라의 국정(國政)을 논하는 자리에서 일할 인물들을 뽑게 된다. 이 또한 씨 뿌림의 일환이다. 따라서 모든 유권자인 국민들은 농부의 심정으로 임해야 한다. 

 

좋은 나라, 성숙한 정치, 집단의 사욕이 아닌 국민 주권을 세우려는 성실한 국회의원, 든든한 식견을 갖고 함께 뭉친 정당이 누구인지를 폭넓게 살펴서, 내일의 우리 살림을 맡겨야 한다. 국민은 자기 수준만큼 일꾼을 뽑는다. 정신 차리자. 좋은 일꾼이 선택 되도록 기도하라. 자식 농사를 잘해야 하듯, 정치 농사도 잘해야 환란에서도 편안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좋은 지도자를 둔 나라이기에, 이 환란 때를 얼마나 다행스럽게 지내고 있지 아니한가!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함께 이 부활절기를 감사하며 맞이하자. 이 부활절기와 함께 이 세계적인 코로나의 위협과 그 후유증까지도 꺾고, 승리와 기쁨을 노래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도록 기도하자. 우리는 패배한 신(神)을 믿는 자들이 아니다. 죽음까지 이겨내신 승리의 왕을 믿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절기 첫 주일인 오늘, 우리는 바로 그 분을 만나고, 그의 세계에 가득 차게 흐르고 있는 부활의 영적 기운을 충만하게 받도록 하자. 

 

오늘의 세 본문은 이렇게 편성되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죽은 자의 첫 열매인 예수의 부활하신 첫 현장의 모습을 마주보게 한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그 부활의 첫 증인들이 그 날 아침을 어떻게 맞이하였는지를 상세히 전한다. 구약은 죽음과 어둠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살리시는 능력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돌 같이 침묵했었던 모습을, 역사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있었던 사건들 중심으로 전해준다. 그때의 부활은 사건과 상황을 완전히 압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서신서는 예수의 부활이 죽은 자의 첫 열매임을 밝히면서, 부활하신 주님이 그 이후 완전한 승리를 아버지께 바치기 위해 어떤 싸움을 통해, 그 나라에 이를 것인지를 전한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그 날 이른 아침-’, 그들 몇 명은 이제껏 이 지구촌에서 살아왔던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희한한 빛을 보았음을 전한다. 그것은 항상 칠흑 같은 어둠과 정적과 침묵만이 무겁게 짓눌려있던 무덤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진정 놀랍고 기이한 빛(light)이었다(1절). 

그것은 바깥에서 스며들은 자연의 햇빛이 아니었고, 인간이 인위적인 밝힌 등불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죽은 자가 안치되었던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나, 덮었던 수의를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후 바깥에 나가면서 그 있었던 공간을 ‘빈 무덤’으로 만들어 놓았던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보게 된 기이한 빛이었다! 즉 죽음을 허망한 것으로 만든 부활의 찬란한 빛을 본 것이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말이다-!!!

 

1) 첫 목격자는 새벽에 그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였다. 여러 명의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다고 전한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본 복음서는 유독 이 여인만을 빈 무덤의 목격자로 세운다. 그때 마리아는 무덤에서 옮겨진 돌문만을 보고, 예수님의 시신이 실종(失踪)됐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급히 달려가 베드로와 평소 주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2절). 

 

☞ 마리아의 이 추측성 발언(2절)은 두 가지 항간의 소문에 기인한 것이다. 제자들이 사망한 그들의 스승 예수의 시신을 빼돌렸거나(마27:64, 28:11-15참조), 무덤지기가 예수의 시신을 강탈하였으리라는 추측(15절, 19:41참조)이다. 제자들의 입장은 당연히 후자의 경우였으리라. 

 

2) 제자 두 사람은 급한 마음으로 무덤으로 달려갔다(3-4절). 그 과정에서 두 제자의 행동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났다. 젊은 제자는 베드로보다 더 빨리 무덤에 가서 허리를 구부려 그 안을 살펴는 보았으나, 정작 무덤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뒤늦게 뛰어왔던 베드로는 곧장 무덤 안으로 직행했다. 둘 사이에 무엇이 보이나? 둘의 차이는 계속됐다. 베드로는 먼저 들어와 빈 무덤을 보고 그 사건의 중대성을 깨닫지 못했지만, 다른 제자는 뒤늦게 들어왔음에도, 주님이, 예고하신 대로(눅18:33), ‘죽음에서 부활(復活)하셨음’을 기억하며 믿었다(5-8절). 

 

3) 빈 무덤을 보고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고, 또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후에 친히 제자들을 찾아가 만나주시면서, 그 때부터 이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예수의 부활의 빛을 받아서 전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인물들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그 뿐인가. 그 날과 그 사건 이후로, 이 세상의 역사의 구도도 그 부활의 빛을 믿고 찾아 나선 이들과 그 빛을 외면하며 어둠의 그늘에 빠져 사는 이들로 양분(兩分)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 빛을 보고 경험한 이들이 자기 생명을 걸고 그 부활과 그 세계를 증언하는 ‘부활 복음의 바이러스’로 뜨겁게 활동하였기 때문이었다.  

 

구약을 보자

본문의 말씀은, 부활이란 하나님의 영적 능력이 예수를 통한 ‘인간 부활’ 이전부터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을 전한다. 즉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살리는 부활의 능력은 창조 때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능력은 세상 현실의 어둠과 사망의 굴레를 뚫고 생명과 구원을 안겨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나타났다. 즉 부활이란 정체는 예수 부활 그 이전부터, 아니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영과 빛으로 이미 활동하여 왔었음을 말한다. 

 

그렇다. 비록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을 지라도(고전15:20), 그렇다고 부활이란 실재가 예수로부터 갑자기 시작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 보유하신 부활의 능력과 그 역사는 창조 질서의 하나로 에덴동산에서부터 존재하였고, 그의 백성들과 만물을 지키고 돌보며 다스리고 그 역사를 이어가게 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존재해 왔다. 일찍이 그런 부활의 실재를 알았던 바울의 말이다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15:15-18). 

 

그러면, 구약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셨는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발생하였던 두 가지 승리의 대형(大型)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다 : 

 

☞ 출(出)애굽 때에 나타났다(19절).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을 애굽 바로의 학정에서 빼내어 오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자유인으로 살게 하시고자 홍해를 건너게 하신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대 역사가 훙해 바다를 매체로 하여 일어났다. 애굽과 시나이 반도 사이의 홍해(紅海)에 큰 길을 내신 여호와는, 그 큰물을 이용하셔서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가르셨다. 

 

당신의 명령과 보호 속에서 애굽을 탈출하는 백성들에게는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이끄시고, 그런 당신의 백성을 저지하려고 뒤쫓던 바로의 악한 무리들에게는 생명에서 죽음에로 몰락(沒落)하게 하시는 놀라운 방법으로, 여호와의 인간과 역사를 죽이고 살리시는 심판과 부활의 능력을 여과 없이 보여주신 것이다. 이 홍해 도강(渡江) 사건은 그 후 이스라엘의 영원한 찬양과 감사의 주제가 되었고, 그 일에 대한 기억과 믿음은 그들을 살리고 구원하는 동력이 되었다(19-21절). 

 

☞ 출애굽 후 40년이 지나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여호와의 적들을 제압하시는 능력이 얼마나 두렵고 놀라웠던 지-, 그들이 가나안에 입주할 때의 주변 국가와 백성들이 보여 준 모습을 본 이스라엘은 입을 모아, 자기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능력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13-18절). <모세의 찬양>으로 불리는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 장면들이 매우 실제적이며 뜨겁다. 주의 능력을 부활의 차원에서 다시 보게 한다-! 

 

1) 여기에서 하나님의 절대 보호 대상은 당신의 구속하신 백성들이다(13절). 그들은 애굽에서 어린 양들의 핏 값을 지불하고 당신의 백성들로 사신 대상들로서, 소유권이 당신에게 있다고 보신 것이다(출12:3-14참조). 그 후,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이 등장하였는데, 그게 바로 당신의 아들예수의 이름과 그의 십자가의 핏 값으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입된 양자(養子)들이다(삼하7:14, 마6:9, 요3:16등등). 그들에게 여호와는 마치 자식을 돌보는 아빠와 엄마가 되셨다! 

 

2)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시는 위엄과 위세가 얼마나 엄위(嚴威)하던지-, 출애굽 기자는 이렇게 그 장면을 전한다. 여러 나라들이(블레셋-에돔-모압-가나안 등) 듣고, ‘떨며-두려움에 잡히며- 놀라고-떨림에 잡히며-다 낙담하며-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매 주의 백성들이 통과하기까지 그들은 ’돌 같이 침묵‘하였다’(14-16절). 이는 여호와의 부활 능력의 권세가 얼마나 큰 지와 함께, 예수가 무덤의 사망권세를 젖히고 일어나실 때, 발했던 초능력도 엿보게 한다. 

 

3) 그러면 당신의 백성을 가나안에 인도하신 뜻은 무엇일까? 선하신 뜻이 없이, 그저 하나님의 능력만을 과시하려는 것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선하신 하나님이 그의 능력을 드러내심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17-18절). 

 

☞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시온산/가나안)에 심고자 하심이었다. 거기에 그들을 심어 당신의 이름을 높이며, 당신의 처소(處所)로 심어 뿌리 내리게 하고자 하심이었다. 그래서 오직 여호와만이 홀로 모든 신들 중에 왕이심을 드높이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들을 세계 만민 중에서 ‘씨앗된 백성’으로 심으신 것이다! 누군가 맡아야할 몫인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맡기셨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려고, 주의 거룩한 힘(부활의 능력)을 동원하셨다. 

 

서신서를 보자

세상 역사와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여호와의 불멸의 능력은 이제는 인간의 생명 영역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통하여, 그 실체를 드러내셨다(20절). ‘첫 열매’란 말은 예수가 온전한 부활체의 첫 인물이란 말도 되고, 그로 인하여 함께 부활할 모든 이들의 첫 사람이시다’는 말이기도 하다. 

 

1) 사도 바울은 대표(代表)원리를 통하여 예수 부활의 의미를 설명한다. 즉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로서, 아담 이래 인류에게 씌워진 죽음의 연쇄 고리를 끊으시고(롬5:12-21참조), 죄와 저주의 그늘 아래에서 신음하며 탄식하던 모든 생명체들이 당신과 함께 부활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신 주인공이 되셨다(21-22절). 이것이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호(號)에 승선할 확실한 이유이다! 

 

2) 하지만 바울은 예수의 부활이 안고 있는 과제들도 말한다. 주의 부활은 마지막 승리를 위하여 밟아야할 차례가 있다. 시작은 첫 열매 예수께서 하셨고(완료), 그 다음은 그에게 속한 그리스도인에게로 확대되며(현재), 마지막은 주께서 세상의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셔서 그 장악한 나라를 하늘 아버지께 바친다(미래-/23-24절). 즉 최후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장악하신 만물을 양도하시므로, 온 세상 만물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유(萬有)의 주(主)요 만유 안에 계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복종하게 되고, 여호와가 완전한 왕이 되신다(시110:1, 계20:4-6참조). 그 때에는 마지막 원수(怨讐)인 사망(死亡)도 멸망을 받아서, 더 이상 인간 위에 군림하지 못하게 된다(25-26절).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統治)가 시작된다!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예수 부활 이후의 최후를 향해 가는 하나님 나라 청사진(靑寫眞)이다! 깊이 명심해 두자. 

 

결론이다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를 찬양하자. 일찍이 그의 부활의 영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과 영광으로 채우시고, 그의 자녀 되게 하심에 감사하자. 다만 이제 주님이 부여하신 내 안에 있는 부활의 영은 하나님의 사랑과 새 생명들을 생산하는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저 어둠의 세력들에게 생생히 보여주는 빛으로도 나타나야만 한다. 그래서 이 세상 만물들이 주님께 다 엎드려 경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지금은 마지막 원수인 사망의 권세가 자기의 때가 다 된 줄을 알고 더욱 열을 낸다. 정신 차려 깨어 대응하자. 부활의 주님이 우리의 대장이시다. 인내로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 부활의 증인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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