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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1)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3.1절 기념주일

관리자 2020-02-25 (화) 21:40 4년전 1082  

본문) 요 13:16-30, 애 3:55-66, 롬 7:14-25

 

세계 기독교회의 셋째 해 사순절(四旬節/Lent) 절기가 시작되었다. 이 절기는 어느 때인가? 악과 범죄로 한없이 망가진 이 땅, 하지만 본래는 당신의 하늘 아버지가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장)라고 그토록 감탄하시고 기뻐하셨던 그 땅을 회복(回復)시키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 오셨던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마16:16)의 지상(地上)에서의 마지막 행보가 펼쳐진 때이다. 주일을 제외한 부활절 전, 40일간의 기간이 계속된다. 절기의 색깔은 보라색이다. 

 

게다가 오늘은 한국교회가 큰 의미를 가지고 지켜오는 3.1절 제101주년 기념주일이기도 하다. 3.1운동은 독립만세운동을 통하여 일제(日帝)의 불의한 억압에 저항하며,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주체적 민족임을 온 세상 천하에 공포한 일이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운동이 우리 대한민국의 5000년 정신사(精神史)에서 마치 모퉁이돌과 같은 사건이었다는 것과 함께, 그 정신을 오늘과 내일에도 충만히 이어가기를 다짐하는 기회로 맞이하여야겠다. 

 

동시에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19’라는 낯선 질병의 무서운 공습(空襲)을 받아, 지구촌은 물론 우리나라 전체도 심각한 위기 속에서, 사순절을 맞이하고 있음도 더불어 생각해야 하겠다. 요즈음은 아예 전국교회 집회도 대폭 축소되거나 아예 회집되지 못하는 실정이 아닌가! 

 

매우 유감스러운 모습도 있다.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이 코로나 질병이, 마치 현 정부와 대통령이 잘못하여 일어난 것처럼 공격하는 행태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정파적(政派的) 입장은 매우 유감스럽다. 심지어 어느 누구는 현 총리의 ‘세균’이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그 이름 때문에 이 병이 발병한 것처럼, 설교에서 빈정대고 있음은 더더욱 개탄스럽다. 그야말로 신성해야할 강단을 공의가 아니라 사의를 펼치는 무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든, 하나님의 준엄하고도 선하신 뜻이 개입되어 나타나지 않는 법은 없다. 이번 코로나 발생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은 손길을 느끼게 한다. 특히 신천지 집단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강렬함을 느낀다. 비록 국가적 재난 수준의 고통으로 전 국민이 고통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바람에 우리 사회와 종교에 오랜 세월 은폐(隱閉)되어 있던 부끄러운 속살들이 여과 없이 폭로되는 일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무서운 재앙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냉혹한 심판(審判)앞에 선 모습들이다. 어떤 것들인가? 대략 세 가지로 보인다. 

 

첫째는 신천지란 이단(異端)의 속살이 폭로(暴露)되고 있다. 그 동안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와 특히 정치계가 이 신천지 집단과 맺은 막후의 관계가 늘 궁금했었는데-, 이번 일로 인하여 온 국민에게 신천지와 그의 일당들의 관계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강제당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코로나 발병의 진원지가 대구와 청도에 있는 신천지교회와 관련 병원으로 판명되면서, 온 국민과 세계까지도 주목받는 대상들이 된 까닭이다. 그들은 전체 확진자의 약 80%가 넘는 수치로서 확진자들을 전국에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집단임이 드러났다.

 

은폐와 술수로 자신을 키워 온 그들에게, 이번의 사건은 정말 청천벽력(靑天霹靂)일 것이다! 모든 것을 까밝혀야만 하고, 그들 조직과 조직원들과 관련 인사들까지 폭로되어야 할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주의 말씀을 대면하게 되었다! 

 

둘째는, 그런 신천지와 지금 광화문 광장을 반정부투쟁의 장으로 삼고 있는 거짓 선지자 전광훈과의 밀착(密着)관계가 주목받게 되었다. 그 동안 그 둘 사이의 밀착에 대한 항간의 소문은 많았다. 하지만, 이번 관계로 그들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전광훈이는 누군가?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대표회장이다. 전광훈이가 그 자리에 오르기 전의 한기총은 기독교방송(CBS)과 함께 신천지 집단으로부터 밤낮없이 저주와 총공격을 받아왔던 단체였다. 예전의 한기총은 신천지를 가장 질 나쁜 이단으로 앞장 서 공격해 왔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광훈이 대표회장 되면서는 아예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이단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멀쩡한 대통령을 빨갱이로 몰면서 온갖 저주와 악담을 퍼붓는 일에 앞장서자, 한기총은 신천지의 뜨거운 지원을 받는 단체가 된 느낌이다(?). 코로나 사건이 발행한 후, 단 한 번이라도 전광훈의 입에서 신천지를 비난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그 동안의 한기총 회장이라면, 당연히 그들을 공개적으로 정죄하여야했다. 그런데 전광훈의 입에서는 오히려 ‘야외에 나오면 괜찮다’라며 코로나 발생을 무마하는 듯한 발언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궁금하다. 그 많은 지방의 집회 참석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강력한 종교나 정치조직의 밑받침이 없으면 그렇게 모이기 쉽지 않다. 대부분 연장자들인데, 자기 돈을 드려서 그 집회에 오고가는 자들은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 많은 이들의 밑돈을 꾸준히 대주는 세력은 누구일까? 애국의 돈일 리가 없다. 불의한 돈의 힘이 분명하다. 이제 그들 민낯들도 보아야할 때이다. 

 

셋째는 신천지와 통합미래당과의 긴 유착관계이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박근혜와 이명박이 신천지 단체와 밀착되었던 일들은 이미 고전이다. 심지어 지난 이름인 ‘새나라당’이란 이름도 신천지와 관련된 이름들이란 설도 많았다. 이번 일도 그렇다. 당 대표란 자가 이 대구 신천지의 피해로 전국이 이렇게 고통하고 있는 데에도, ‘그 책임을 어느 특정 집단에게 돌리는 것은 마땅치 않다,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봐야한다’는 식으로 신천지의 치명적인 책임을 덮고 있다. 신천지나 전광훈이도 자기 진영을 돌보아 줄 정치세력들을 필요로 한다. 그들이 누굴까? 민주당일리 없다. 그들과 체질이 통하는 통합당이 자기들의 완전 보호막이 되어 줄 대상이다.

 

그러기에, 지금 저들은 저토록 비(非)정상적인, 아니 반(反)기독교적인, 아니 비(非)성서적이며, 반(反)예수적인 행태들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 바람에,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종(從)이 주인인 것처럼, 위장성세(僞裝成勢)를 누리고 있다. 최근에는 전광훈의 입에서,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면서, 최악의 막말을 대중 앞에서 늘어놓고 있다. 그러면서 서울경기지역의 대형보수교회들을 끌어들이고자 혈안(血眼)이다. 자기의 사이비 정치 세력들 속에, 신천지는 물론, 정상적 교회까지도 하나로 묶어내려는 사탄적인 고위 전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괴수 전광훈의 광대놀음에(?) 소위 유명하다는 목사들도 휘말려들고 있는 듯싶어(?) 정말 유감이다.  

 

마침 오늘 사순절 첫 주일의 말씀이 우리의 이러한 어두운 영적 현실을 직시하며 경고하신다. 주인에 대한 종들의 배신(背信)이 주제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잠시 쓰임 받고 있는 자가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자기가 마치 심판자인양 허위의식을 과시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詛呪)도 주제이다. 아울러, 그런 모순에 자기도 모르게 휘말려들게 하는 우리 안에 엄존하고 있는 죄(罪)와 악(惡)에 성격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어서, 더욱 살펴야 할 주제이다. 

 

그 배신의 주체는 가룟 유다와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기도 하고, 이스라엘을 곤경에 빠뜨리고도 끊임없이 피해(被害)세력을 조롱하던 가해(加害)세력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사람이면서도 그러나 자기 안에 씻어낼 수 없이 현존하는 악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내 개인적 실존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을 향한 배신의 그림자에게서 자유로울 자는 아무도 없다! 사도 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는 탄식에 다 들어있다. 그렇다면, 출구는 어디에 있나? 

 

복음서를 보자

가룟인 유다의 배신 이야기가 올라와 있다. 그러면 궁금하다. 유다가 왜 예수를 배신했을까? 그 원인을 찾고자, 예수께서 모두(冒頭)에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게 된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福)이 있으리라’(16-17절). 주님이 유다의 배신과 이별을 염두에 두시면서, 이 의미 있는 말씀을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 몇 가지 상황들에 대한 추측이 가능하다. 

 

1) 유다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주장이 강했다. 심지어 스승의 가르침보다 자기 입장 표명을 앞세우는 일이 많았다고 본다. 즉, 스승의 주장에 대체로 승복하기보다는 자기주장으로 맞서는 경향을 취한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마음 한편에는 스승을 얕보는 마음까지 있었다고 본다. 제자로서 오버(over)도 큰 오버였다. 스승이신 예수께서도 통제가 불가능하셨다고 본다. 

 

2) 유다의 마음을 주도하던 사고의 강한 틀(프레임)이 있었다. 무엇이든 계산적(計算的)이고, 물질(物質)중심주의적 사고가 그를 늘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제자단(團)의 돈궤를 맡을 정도로 인정받기도 하였고, 제자단의 재정집행도 도맡았던 실력자이기도 했다(29절). 그런 그는 매사에 주님 주변에서 시행되는 일들을 놓고 재정적 시각으로 평가하는 일에 능하였다(요12:4-5). 그러기에 매사에, 영적 가치와 생명 구원을 위해 재정을 사용해야할 스승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항상 탈(脫)물질주의적 사고를 하시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비하하였을 것이다. 

 

3) 스승의 몇 차례의 주의와 경고에도 요지부동했다. 오늘 본문에서만 보더라도, 주님은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들을 주셨다(10,18,21,26,27절 참조). 하지만 여전히 그는 외면했고, 끝내 자신의 길을 갔다. 역사의 어둠과 밤을 열고 나아간 인물이 되었다(30절). 시41:9의 말씀(중동에서는 아주 모욕적인 몸짓으로 남에게 발바닥을 보임)의 실현을 스승에게 보여준 무례한 존재였다. 그런 자였기에, 스승을 은30에 흥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팔아넘길 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마26:14-16). 진정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존재가 된 것이다(막14:21). 

 

☞ 유다의 이와 같은 행위들의 결과는 ‘예수의 버리심’과 ‘사탄에게 내어줌’으로 이어졌다(27절 참조). 동시에 예수님의 시선(視線)은 그럼에도 여전히 당신을 영접하고 신뢰하며 좇는 제자들에게 집중되었다(20절). 그들과의 영원한 관계가 천명되면서, 그들을 끝까지 지켜 주셨다. 

 

☞ 유다의 실패에서 무엇을 찾게 되는가? 예수를 만나고 그의 백성이 된 이들에게는 오직 예수와 그의 말씀이 최대의 삶의 지침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고 인간적 자아를 계속 고집하거나 자기 가치관을 앞세우며 저항하는 일은 예수 앞에서 불가함을 깨달아야 한다.

 

서신서를 보자

그러면, 우리가 예수 앞에서 왜 인간적 자아(自我)를 고집하면 안 되는가? 그 점에서 서신서의 말씀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한 답을 제공한다. 그는 본래 완고한 율법주의자였다. 그 시절 그는 유대의 랍비문학을 통하여 배운 것이 있었다. 사람이 13세로 ‘율법의 아들’이 되면, 자기 안에 선한 충동과 악한 충동이란 두 가지 대조적인 충동들이 있음을 감지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자기 인격 내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계속 투쟁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랍비적 치유책은 율법에 대한 헌신적인 연구와 그 실제적 적용에 힘쓰는데 있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의 말씀연구와 선행실천은 대단한 수준을 유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보혜사 성령을 만나면서 그의 사람이 된 이후에는, 시각이 달라졌다. 비록 율법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하고 신령한 것일지라도, 그래서 그 율법에 매달려 구원을 얻고자 노력할지라도 그게 근본적으로 불가능함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우리의 육신 안에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죄와 악이 엄존해 있기 때문이다(17-21절 참조).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아니한 것을 끊임없이 행하는 모순 속에 빠져 산다. 율법의 기능도 매우 한정적이다. 자신의 죄악과 심판과 죽음을 알려는 주어도, 그 악과 죄로부터 인간을 해방될 수 있는 능력과 힘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보다 경건한 사람이나 의인이라고 해서 특별하지도 않다. 자기 자신의 영적 자만심에 빠져들수록, 오히려 죄는 더욱 기승(氣勝)할 뿐이다. 가룟 유다가 빠져 든 함정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면 이런 곤고한 우리에게 해결책은 무엇인가? 오직 성령과 연약한 우리를 돕는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부족을 고하며 그의 은혜와 자비를 의지하고 호소하는 일이다(22-25절,요13:20참조)!  

 

구약을 보자

겉 표현은 선지자 예레미야 개인의 것처럼 나왔으나, 실질적 내용은 집단적인 피해자인 이스라엘과 가해자인 바벨론 사이에서 발생한 상황과, 그로 인해 파생된 말할 수 없는 수치와 조롱을 당하게 된 아픈 현실을 여호와께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본 애가에는 바벨론 현장에 끌려간 이들의 탄식이 아니라, 그 포로로도 끌려갈 자격도 없어서 성도 예루살렘에 버려진 이들이 주변의 다양한 공격자들로 인하여 겪은 수모와 억울함과 원통함들이 집약되어 있다. 

 

이들이 여호와께 탄식하고 부르짖은 내용은 이것이었다. 즉 심판의 도구에 불과한 세력들이 마치 자기들이 심판자인 양 군림하면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현재는 피압박 민족인 자기들에게 말할 수 없이 모독하고 박해하는 역습에 견딜 수 없어 했다. 심판이 끝나고 회복의 시절이 오면, 정반대의 위치에 설 두 세력들로 보았기에, 그것을 바로 잡아달라며 호소하였다. 이것은 본질이 비본질의 오만과 위세에 고통하는 일을 주께서 벌(罰)해달라며 호소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행하면, 그것은 범죄라는 것이다. 죄인을 향한 복수(復讐)라도,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복이 됨을 역설하였다. 가룟 유다처럼, 주의 종이면서도 자기주장과 의를 내세우는 일은 벌을 받게 됨을 알려주었다

 

결론이다

주님 앞에서의 나의 믿음의 행보는 어떤가? 여전히 내 의견, 상식, 판단중심적은 아닌가?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겸손히 구하며 좇아 사는가? 가룟 유다는 멀리 있지 않다. 충분히 내 안에 엄존한다. 지금 괜찮다고 계속 안전하지 않다. 가짜와 사이비로는 안 된다. 진짜와 본질로 승부하며 매달려야 한다. 참된 종으로 돌아가자. 유다 형 배신자는 더더욱 안된다. 더욱 겸손하자. 부족을 시인하자. 오직 나는 주인의 영원한 양이기를 소원하며, 자기를 부인하며 주의 십자가를 매고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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