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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0)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관리자 2019-10-30 (수) 22:52 4년전 1125  

본문) 삼하 1:17-27, 요15:12-17, 계14:13-15:4

 

전국에 단풍(丹楓) 천국이 펼쳐지고 있다.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이 좋은 계절의 정취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란다. 가을이 짧아서 유감이지만, 그런 것 탓하기 이전에, 우선 주어진 좋은 것들을 넉넉히 맛볼 줄 아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웃 일본 사정은 매우 참담하다. 연이은 대형 태풍들의 공습을 받으면서, 그들이 자랑해오던 천혜의 관광지들인 중부 지역들이 물벼락을 당하고, 수많은 사망자들과 재산 피해를 당하면서, 이 좋은 계절 가을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안타깝다. 일본과 좋은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쯤은 일본 수재민 돕기 캠페인도 일어날 뻔한 수준이다. 과거에 우리는 그곳 고배에서의 대지진 참사에 우리 국민과 교회들 구호헌금을 보낸 적도 있었잖은가!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말이 있다. 남에게서 일어난 일에서 삶의 교훈을 찾는다는 말이다. 비록 일본에 대한 감정이 상했더라도, 원수처럼 대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런 태도를 창조주 아버지께서 우선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위로도 전하는 것이 좋다. 우리도 조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쏟아진 기상과 환경 재앙들이 또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까지 미쳐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부디 항상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누려야 한다. 

 

두 주 전의 말씀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마음들, 즉 주위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이웃에 무정(無情)하고 무관심해진 유대 종교인들의 자세를 향하여 분노하셨던 예수님을 대면한 적이 있었다(마11:16-17참조). 그들의 마음에는 오직 자기들의 이해관계에만 몰두하고, 모든 생명들을 공히 당신의 자녀와 백성처럼 섬세히 아끼고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그들 속에서 완전 고갈되어 있어서-, 주님은 그토록 아프셨던 것이다. 그런 메마른 영혼으로는 이웃 사랑이 절대 불가능하기에, 더욱 그랬다.  

 

우리는 내 삶과 내 주변에서 자꾸 미워해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비판하고 증오할 사람들이 많아지는 일을 심각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것은 내게 큰 시험을 주며, 오히려 나를 해치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기에 성령께 구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내 안에 상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자리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이다. 비록 내 삶을 불편하게 하는 자들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를 용서하고 친절까지 베풀 수 있게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물론 그런 훌륭한 모습을 내 것으로 삼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요즈음처럼, 정치판에서 혐오감을 갖게 하는 사건이나 실망스러운 인물들을 보게 되면, 우리들의 심성도 무척 망가져 내릴 수 있다. 그러기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들을 탓하고 미워하다가 우리까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마귀의 작전이 아닐까 싶기에, 더욱 경계할 국면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창조세계를 돌보아야할 우리들의 마음은 확실히 세상보다는 차원이 달라야 할 것이다.  

 

오늘은 창조절 열 번째 주일이다. 지난 주 우리는, 다윗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는 주(主)이시다’는 증언을 들었다. 우리 역시 그의 증언에 아멘하며, 예수를 내 삶의 구세주로 영접하며 그를 의지하며 따라 살기로 재 다짐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여 살게 된 우리들의 영적 수준(水準)이 어느 정도여야 할까? 세상과는 보다 차원이 달라야만 하지 않을까? 특히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지수(指數)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종말에 창조주의 심판 앞에 멸망당할 세상과 똑같아서야, 어찌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을까? 뭔가 차이가 분명해야 그래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생명의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의 세 본문들은 바로 그 점을 문제로 띄운다. 평범한 듯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아주 차별되는 그 모습 말이다. 소위 작은 차별이 영원을 가르는 것이 될 그것 말이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사랑의 넓이(幅)과 품이다. 그리고 그것을 힘들어도 잘 지켜내는 인내심을 가진 것이다. 

 

구약을 보자

본문은 다윗이 유다 왕이 되기 직전의 사건을 담은 기사로서, 일명 <활의 노래>라고 알려진 슬픔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에게 슬픔을 안겨 준 사건은 그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주인공들인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다른 왕자들인 아비나답과 말기수아와 함께 블레셋과의 대 전투에서 참담하게 전사(戰死)한 일이었다. 일종에 ‘왕족의 몰살’이 발생한 일이었다. 

 

충격과 슬픔에 빠진 지도자 다윗은 두 가지 긴급조치를 취하면서 위기에 대처하였다. 첫째는 자기의 주이신 하나님을 향한 태도 표명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왕으로 삼은 사울을 자기의 칼로 죽인 외국인 아말렉 사람을 처형했다. 비록 사경(死境)에 빠진 왕으로부터 자기를 ‘편히 죽게 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칼로 죽였고, 그의 유품까지 거두어 다윗 편에 건내 준 인물이었지만(1:5-10참조),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는 인간이 손(해침)을 대서는 안 된다는 강고한 믿음을 견지해 온 다윗에게는(삼상24:10,26:9참조), 그의 그런 행위를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모습을 주께 보여 드린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의 행위가 매우 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게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일이라면 그에게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기에 다윗은 자기를 쫓았던 사울을 손쉽게 처단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처리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하신다’는 입장에서 해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다윗은 사울에게 큰 고통과 고단함을 계속 당했으나, 결국 그 행위와 중심을 보신 하나님의 개입으로 사울 왕가가 그렇게 정리되고 말았다. 

 

둘째는 세상 백성을 향한 태도 표명이다. 그는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존중심에서 온 백성과 함께 왕의 죽음과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의형제였던 요나단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저녁까지 슬퍼하며 울며 금식했다(12절). 그리고 활의 노래를 작시(作詩)하여 역사적인 야셀의 책에 기록될 차원의 노래로 만들어 국민 가(歌)가 되게 하였다(17-18절). 

 

주목되는 대목은 전사한 사울과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칭송(稱頌)이다. 이것은 다윗이 상대를 사적 감정과 관계 차원이 아니라, 공적 차원에서 그들을 인정하고 칭송한 것이다. 개인적인 입장만 보면, 사울은 그의 원수였고, 그의 아들인 요나단만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울에 대한 예의에 철저했다. 비참했던 그들의 전사를 매우 슬퍼하며, 그 소식을 세상과 백성들과 적들에게까지도 감추고 싶어 하였다(19-21절). 

 

다윗의 칭송은 뜨거웠다. 전사한 사울 왕 부자의 사망이 결국 자신들의 전쟁에서의 승리의 칼과 활이 되어 돌아왔다고 평가하면서, 그들의 순직의 의미와 가치를 희생적 밑거름으로 높였다(22절). 그리고 그 부자의 동시적인 전사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관계로 규정하면서(23절), 특히 사울 왕의 용맹함과 그의 생전의 치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에 서슴지 않았다(24절). 물론, 의형제인 요나단을 위한 애통함도 절절했는데, 그의 다윗에 대한 사랑은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 하였다고 추억하였다(25-26절,삼상18:3-4참조).  

 

이런 다윗의 조가(弔歌) 보급에서 돋보이는 점은, 원수와 같았던 사울을 향한 다윗의 최상의 접근 자세이다. 그의 방법은 확실히 일반 수준을 훌쩍 뛰어 넘는다. 생각해보라. 대부분의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또 불편한 이들의 잘못됨에는 외면하거나 저주로 대처하곤 한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유일하신 왕 여호와의 거룩한 손길을 받았던 왕 사울임을 잊지 아니하고, 그의 사망 이후에까지도 최상위로 우대한 것이다. 

 

이런 그의 모습은 확실히 남다르지 아니한가! 그의 처신은 그런 점에서 정치적(政治的)이 아니라 신앙적(信仰的)이었다. 바로 다윗의 그 점이 우리의 이웃 사랑, 특히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근거를 주는 것이 아닐까!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다윗이 예수의 조상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본다. 그리고 그의 그런 사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네 원수를 사랑하라’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접근할 수 있는 전거를 제공했다. 

 

복음서를 보자

본문은 우리의 이웃 사랑이 그 어떤 장애에도 넘어서서 가능하다는 점을 전해준 내용이다. 예수님은 유대교에 의하여 무너진 이웃(형제) 사랑의 복원의 위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Love each other)는 계명을 부여하신다. 

 

평소 예수님은 새 계명을 부여하기 보다는 이미 주어진 율법을 통하여 제시된 계명들을 확인시키고 실천하도록 격려하신 편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떠나실 때가 임박하자,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당신 이후의 시대를 감당하기 위하여 필요한 절대 요인(要因)들을 계명(command)으로 부여하셨다. 계명이란 무엇인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지켜야만 되는 명령이다! 필요하면 지키려면 목숨도 걸어야할 가치를 보유한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12,17절). 이 계명 준수 여부가 이제 그의 제자 됨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지표(指標)가 되었다. 제자들을 하나로 결속시킬 열쇠도 되었다. 그 계명의 준수로 하나 된 제자공동체와 교회 공동체 속에 주님은 당신이 함께 계실 것임도 약속하셨다. 그밖에 이 계명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하여서도 주님은 명백히 언급해 주셨다. 경청(敬聽)해보자. 

 

1) 주님은 우선 서로 사랑할 근거로 ‘당신이 제자들에게 베푼 그 사랑’을 제시하셨다(12절). 이것은 예전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19:19,갈5:14)란 기존의 계명보다 훨씬 더 나아간 것이다. ‘네 몸처럼’이란 말은 분명히 우리가 내 몸을 지극히 아끼고 돌본다는 차원을 담고는 있으나, 실재로는 상당히 애매한 부분이 있다. 자기 몸 사랑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 사랑과 인간 사랑의 차원은 결코 애매하지 않다. 너무도 분명하다. 죄인과 버림당한 자와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주어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신 바로 그 사랑이기 때문이다. 특히 죄인과 원수까지도 포용하고 용서하는 희생을 담고 있는 사랑이어서, 신. 불신을 떠나 누구도 그 예수의 계명에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2) 주님이 보신 ‘가장 큰 사랑’은 자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랑이었다(13절). 그것은 당신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었음을 드러내신 것이다. 동시에 다윗을 사랑했던 요나단의 헌신과 희생도 그렇게 평가하셨다고 보인다. 요나단의 죽음은 결국(자신의 의도 여부를 떠나서) 친구 다윗의 왕의 길을 활짝 여는 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3) 그러면서 주님은 형제애를 실천하는 사람들도 누구나 당신의 친구라고 밝히시면서(14절),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당신의 친구가 될 영광과 기회도 부어주셨다. 예수의 친구가 되는 일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신과 인간의 친구 관계의 예표는 이미 모세가 여호와와 친밀하게 대화하는 모습에서 확인된 바가 있다(출33:11참조). 

 

4) 내가 ‘전능자의 친구냐, 종이냐’의 문제는 운명이 걸린 주제이다. 종은 주인의 행위들에서 배제되지만, 친구는 모든 소중한 것들을 알고 나누며 산다(15-16절 참조). 이제는 우리가 결단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행하여, 주의 친구로 살 건가, 종으로 살 건가? 

 

서신서를 보자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최후에 위로를 받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될 자들이 누구인지를 전하는 내용이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신앙고백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 사랑하기에, 서로 사랑하다가 세상의 미움을 받아 죽임 당한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로서 복이 있다’고 영원한 선고를 받은 이들이다. 그들의 선행과 믿음의 일들이 심판대에 선 그들을 변호해 주고 있었다(14:13). 

 

또한 짐승의 미혹에 대항하여 죽임을 당함으로서(13:13-17) 천상의 위로를 받고 완전히 의인된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기리는 천상의 찬양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14:1,15:1-4참조). 

 

최근에 나는 집 근처 남한산성에 올랐다가, 뜻밖에 놀라운 믿음의 옛 선조들을 만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시에, 당시의 약 300여명으로 추정되는 천주교도들이 그곳에서 무참히 순교당한 현장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 교우인 한덕운의 믿음은 더욱 빛났다. 그는 참혹하게 순교당한 이들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며 장례를 치러주다가, 주변의 미움을 당하여 그도 동문 밖 형장에 끌려가 참수를 당했다. 죽기까지 친구를 사랑한 그가 지금 천상의 찬양에 참여하고 있지 않을까! 그를 기리는 동상에는 이런 말이 새겨 있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책임(責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 사랑의 현주소를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결론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그 날이 하루하루 다가온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답해야 한다. ‘그 날을 어떻게 맞을 건가?’ 이런 혼란의 시절일수록, 우리가 꼭 해결하고 극복해야할 영적 과제가 있다. 사랑의 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과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강화하는 일이다. 물론 서로 사랑을 못할 이유는 산더미 같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한두 가지 이유만이라도 해야 할 이유를 찾아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세상과는 확실히 구별된 차원 높은 삶을 살고 있음을 확증해야만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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