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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부활절(2-2) - "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 난 사람들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2-04-22 (금) 17:07 1년전 400  

본문) 겔 11:14~20, 롬 6:3~14, 요 3:1~15 


오늘은 부활 후 첫 주일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것은 우리의 신앙의 기본이요 확고한 중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합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롬 6:5)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새롭게 살게 되었다,(11절)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다만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이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밤중에 찾아왔던 사람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의 이력을 보면 먼저, 그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특히 율법을 공부하고 율례를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부르신 것을 보면, 그는 바리새파에서도 지도자였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는 유대 의회원이었습니다. 바리새파가 종교의 지도자라면, 의회원은 정치의 지도자지요. 이 정도면 니고데모는 분명 아주 대단한 인사입니다. 요즘 말로 ‘핵인싸’라 할 수 있겠지요? ‘니고데모’라는 그의 이름도 범상치는 않습니다. ‘니고’는 ‘승리’, ‘데모’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니고데모’는 ‘승리자’라는 이름 정도가 되겠지요. 그는 이름만큼이나 성공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아주 대단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필이면 밤에 왔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누구를 만나신 시각을 지목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때를 적시한다면,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를 때 찾아온 그를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라고 기록합니다. 그가 밤에 왔던 것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입니다.(요 19:39)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무슨 사정으로 밤에 찾아왔을까요? 물어서 확인할 길은 없지만 가늠해 볼 수는 있지요.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떼어주신 빵조각을 받고 밖으로 나간 때도 ‘밤’이었다고 말합니다.(요 13:30) ‘밤’이란 대낮에 내놓고 하기에는 뭔가 께름칙한, 몰래 해야 하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밤에는 남의 이목을 피하기가 좋지요. 니고데모는 바리새파로 유대의 상당히 유력한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바리새파는 언제나 예수님을 적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앞에서, 유대 사람들의 종교 권력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난장을 치셨습니다. 차라리 그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신랄하게 질타하셨지요. 그 정도만 보아도, 니고데모가 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요?


깨달아야 할 표징

그런데 밤중에 온 걸 보면 뭔가 중요한 문제일 텐데, 니고데모는 뭐가 궁금했던 것일까요? 니고데모는 상당한 인품을 갖춘 사람인 듯합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다짜고짜 따지는 다른 바리새파 사람들과는 달리, 정중하게 예를 갖춥니다. 그는 예수님을 ‘랍비님’이라는 최고의 호칭으로 부르면서, 선생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이라고 말하지요.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선생님이 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에둘러 말합니다. 바로 여기서 니고데모가 궁금해하는 것, 그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징들’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표징’이라는 말은 특히 요한복음에서 사용됩니다. 요한복음은 ‘표징의 책’(21:30)이라 할 수 있지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공관복음서에서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요한복음은 이것을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기적’과 ‘표징’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기적’은 놀라운 사건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표징’은 그 놀라운 사건의 ‘의미’를 파고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과 이사의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이 무슨 ‘표징’인지 주목하는 것입니다. ‘표징’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그저 지나간 옛 사건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표징을 확인하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본 표징은 무엇이었을까요? 니고데모가 찾아오기 전, 앞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표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표징입니다.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결례에 쓰이는 여섯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물이 맛깔나는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표징입니다. 여기서 물이 포도주가 된 것, 그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사건은 맹물 같은 유대교의 의례가 맛깔나는 삶의 잔치로 새로워지는 ‘표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죽은 의례가 기쁨이 넘치는 잔치로 새로워진 표징입니다.

그 직후에 예루살렘 성전 숙청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예루살렘 성전 뜰에 소와 양과 비둘기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었지요. 그걸 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모두 내쫓으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걷어치우라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질타하셨지요. 그때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무슨 ‘표징’을 보여 줄 거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여기서 그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면, 그것은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 사람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은 돌로 짓는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세우는 성전이었습니다. 돌이 아니라 ‘몸으로 세우는 성전’이야말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징’입니다. 이 표징을 깨달아야 합니다.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표징’을 깨달았을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보았지만, 그 ‘표징’은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누구든지 다시/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러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느냐고,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였지만 적어도 꽉 막힌 배타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개혁적인 열린 신앙인으로 보입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만, 그래도 밤에 예수님을 찾아올 만큼 진지한 구도자의 모습입니다. 장사꾼의 마당이 되고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는 예수님에게 호의를 보입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는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향한 니고데모의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여기서 ‘다시’ 나는 것은 수평적으로 거듭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그저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무슨 말입니까? 다시 나는 것은, ‘위로부터’ 나는 것은, 육의 반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설령 인간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육의 덧없는 윤회일 뿐이지 ‘위로부터’ 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로부터 나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으로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요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니고데모가 깨달아야 할, 그리고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할 ‘표징’입니다.


내가 성소가 되어 주겠다

오늘 우리는 에스겔서에서, 바빌론에 유배당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희망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바빌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는 백성은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성전이 없었습니다. 성전 없는 백성이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놓았어도,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내가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겔 11:16)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이 없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성소가 되어주신다면, 이제 그의 백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하나님의 백성은, 허접쓰레기 역겨운 우상들은 다 치워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영을 받아야 합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을 버리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의 성소이신 하나님 안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주목한 요한복음의 ‘표징’을 되짚어보면, 첫 표징이었던 가나 결혼 잔치의 표징은, 굳어버린 의례와 예배가 기쁨 넘치는 삶의 잔치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숙청하신 사건은 장사꾼의 마당이 되어버린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근본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종교 의례가, 예배가 새로워져야 하고, 성전이, 교회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우리가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새로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 된 마음과 새로운 영을 받은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이 아니라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이어야 합니다. 위로부터 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위로부터 날 수 있도록, 우리가 영으로 새로워지도록,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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