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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부활절(7-1) - " 그리스도의 사절 " / 5.18광주민주화운동기념주일 / 김거성 목사

관리자 2021-05-13 (목) 17:50 2년전 674  

본문) 단 7:9-14; 고후 5:14-21; 요 17:1-11

 

 

1. 말머리

 

교우 여러분, 주 안에서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부활절 일곱째 주일이며,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 또 아시아주일로 지킵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교우 여러분 모두와 그 가정, 그리고 하시는 일들 위에 주님의 살핌이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2. 고난이 그리스도의 영광

 

요한복음서는 크게 1장부터 12장까지의 ‘표징의 책’(Book of Signs)1) 과 13장부터 21장까지의 ‘영광의 책’(Book of Glory)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17장은 영광의 책 일부입니다. 1-11절, 짧은 본문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영광’이란 단어는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전에서는 영광을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2)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남들 앞에 우쭐댈 수 있는,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영광의 책으로 이어지는, 표징의 책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12:2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즉,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영광은, 그러한 세상적인 해석과는 정반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 13-17장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유월절 바로 전날 저녁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새 계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빈무덤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의 책의 내용은 오히려 온통 수난 이야기 뿐입니다. 고난을 영광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 일부분으로, ‘예수님의 고별기도’라 제목을 달 수 있겠습니다. 영광, 즉 십자가에 달리시는 전날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교우 여러분,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예수님의 사람으로 정하셨음을 믿는다면 바로 이 기도의 대상에는 우리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즉 우리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라는 말씀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절

 

오늘 사도서간문 본문인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고후 5:15).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17절).

 

또 20절에 보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직분을 맡은 ‘그리스도의 사절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사절들’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그리스어로는 ‘프레스뷰오멘’(πρεσβεύομεν)인데, 이는 ‘장로’(elder), 즉 ‘어른’이라는 뜻과 ‘대사’(ambassador)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도 바로 이 본문에서 따온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절이라는 뜻입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가 있듯이,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파견한 사절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아시겠지만, 각 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대사를 보낼 때에는 미리 ‘우리가 누구를 대사로 보낼 터이니 받아달라’고 알리고 수용 의사를 타진합니다. 그래서 접수국으로부터 아그레망, 즉 그 사람을 외교사절단의 장으로 받겠다는 동의를 받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그 사람을 대사로 보내면서 신임장을 통해 접수국에 그 사람이 그 나라를 대표하여 말하는 것임을 신임하여 달라고 요청하게 되는 이런 절차를 밟는 것입니다.3)

 

얼마 전 우리나라에 온 어떤 나라의 대사 부인이 옷가게 직원들을 폭행하여 문제가 된 일이 있습니다. 물론 대사 본인은 아니지만,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한 개인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국격에 큰 손상을 입는 일이 생기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나라에서 생산한 맥주 마시지 말자는 논의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사 부인과 관련된 사건이 이렇다면, 만약 대사 본인이 연루된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 나라의 망신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어떤 나라에 파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대표하여 특별한 과제를 담당하는 대외직명대사라는 제도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공공외교를 활성화시킨다는 취지입니다. 양성평등대사, 반부패협력대사, 환경협력대사, 글로벌보건안보대사 등이 임명되었습니다.

 

사절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대사관에 파견되었거나 직명대사로 임명되었거나 어떤 형태이건 사절은 그 나라를 대표하여, 그 나라를 위하여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사절이라고 하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엄청난 중압감을 주는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있는가? 오히려 그리스도를 욕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4. 류동운

 

오늘 우리는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 또 아시아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번 총회 회보에 실린 “‘순교자’ 류동운을 기억한다”4) 는 제목의 글을 보면 5.18 당시 신앙인의 고뇌를 엿볼 수 있게 됩니다.

 

한신대 신학과 2학년생이었던 류동운은 아버지가 성결교단의 목사님이었습니다. 1980년 5월, 전두환 군부의 휴교령으로 학교 기숙사가 폐쇄되자 그는 부모님이 계시는 광주로 가서 5월 18일 전남대생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다 계엄군에게 잡혀 연행당했다가 풀려납니다. 그는 다시 시위에 나섰고, 진압 작전이 막 시작될 무렵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라는 글을 일기에 남깁니다. 동생에게는 “한 줌의 재가 된다면 어느 이름 모를 강가에 조용히 뿌려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다시 도청으로 향했습니다. 5월 27일 밤, 계엄군이 도청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때 그는 진압군의 총에 복부관통상을 입고 살해당했습니다. 총회에서는 그를 ‘순교자’로 지정하였습니다. 늦었지만 환영할 일입니다.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그가 남긴 글귀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저는 그로 하여금 이 역사 앞에서 이웃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도록 부른 것이 바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정체성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물론 수많은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책임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역사 앞에서, 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책임을 담당할 것인지 고민했을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의 책임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이웃에 대한 책임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책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앞서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요구하십니다.  

 

이웃에 대한 책임? 억울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 내가 이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까? 이미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에게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이때 그는 항변했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 4:9)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 아니 영광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길이고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이른바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 이름으로 신문 광고에 여러 번 등장한 글귀가 있습니다: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 그러면서 이 문구가 독일 히틀러 시대 나치 치하에서 순교한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글을 인용한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본회퍼 연구자인 김성호 박사는 이 표현은 국가에 대한 교회의 책임적 행위로 “교회의 가능성은 더 이상 바퀴 아래 깔린 희생자의 상처를 감싸주기 위함이 아니라, 바퀴 자체를 멈추기 위함에 있다”고 역설했던 것을 오역, 왜곡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5)

 

본회퍼는 기독교윤리학자로 다음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설명합니다.6)

 

 “공개적으로 어떤 입장에 서기를 피하려는 사람들은 사적인 덕망 속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그런 사람은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 간통하지 않는다. 그는 능력 범위 내에서 선행을 행한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기를 포기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갈등에 연루되지 않도록 정확히 허용된 범위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악에 대해서 눈과 귀가 멀었음이 틀림없다. 세상 속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통해 물들었다고 비난받지 않도록 그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기만 행위의 대가일 뿐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가 빼먹은 것은 그에게 평화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이 불안이 그를 파멸시켜 버리거나, 아니면 그는 가장 위선적인 바리새인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 실현은 개인적 차원의 윤리적 선택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이나 조직, 집단이 마땅히 담당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라 하겠습니다. 독재와 부패, 이 두 가지는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독재와 부패에 대한 무지나 태만, 침묵 등은 바로 그런 억업과 착취의 체제에 대한 공모, 방조 또는 묵인으로 이어집니다. 사회의 심각한 구조적 범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개인적 차원의 심오한 도덕성만을 주장하는 것은 그냥 위선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절인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책임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죄악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개인적 차원에서 아무리 심오한 도덕성을 견지한다 하더라도, 주변의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는 갖가지 독재와 부패의 문제들에 대해 모르고 있거나 또는 모른 척 하는 것이라면, 이는 무지와 위선일 뿐 진정한 도덕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현재 민주주의와 정의를 파괴하는 구조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며, 나아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결단하고 실천하는 것이라야 참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책임의 범위를 확장해 본다면 완벽한 그리스도인의 책임 실현이란 과연 실현될 수 있는 어떤 상태가 아니고 그저 우리의 과제에 불과할 따름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절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축소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웃에 대한 무한의 책임 실현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는 <이정표 위의 목적지>일 뿐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무엇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방향성’(self direction)이며, ‘책임을 실현하려는 의지’일 뿐입니다.

 

 

6. 5.18 그리고 미얀마

 

 

민주화운동은 이웃을 모른체 하지 않고 이웃에 대한 책임을 담당하기 위한 행진입니다. 5.18기념주일이며 아시아주일로 지키는 오늘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뜻깊다 생각합니다. 특히 1980년 극악한 군부가 남녁 땅에서 저질렀던 만행이 오늘날 미얀마에서 또다시 반복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는 미스 미얀마 출신 모델이 쿠데타 군부에 맞서 싸울 무장투쟁을 위해 소수민족 무장조직을 찾았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7) 그녀는 쿠데타 100일을 맞아 지난 11일 자신의 SNS에 검은 티셔츠 차림으로 총을 들고 있는 사진들을 올렸습니다. 또 "반격해야 할 때가 왔다"면서 "무기나 펜 또는 키보드를 잡건 아니면 민주주의 운동에 돈을 기부하건, 모든 이들은 이 혁명이 승리할 수 있도록 자기 몫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나아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반격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돼있다.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고 의지를 내비쳤다고 합니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 다니엘서에 보면 네 마리 짐승들의 환상이 나옵니다. 다니엘서의 환상은 묵시문학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무도 극악한 당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선동이었고 불굴의 투쟁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권세는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가능하다는 믿음이 그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7. 마무리

 

 

오늘 요한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사람의 영광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합니다.8)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은 고난입니다. 1980년 5월 남도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 또 희생되신 분들을 기억합니다. 더불어 오늘 이 시간에도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희롱당하고 또 정의가 훼손되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영광, 바로 고난의 길을 스스로 걷는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있음을 확인합니다.

 

오늘 교회의 책임,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합시다. 그리스도의 사절로서의 책임을 깊이 인식하고, 그 바탕 위에 다니엘과 같은 꺾이지 않는 의지로 그 책임의 힘찬 실천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 책임의 크기에 비해 내세울 것 하나도 없는 우리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1)  https://en.wikipedia.org/wiki/Book_of_Signs.

2)  https://ko.dict.naver.com/#/entry/koko/355085c6f685452b8a5c08f6ac7dddec.

3)  참고: 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644_000_10/20150328235455235_R0M48P25H.jpg/83325aa6-f36f-43.jpg?type=m935_fst_nce&wm=Y.

4)  김거성, “‘순교자’ 류동운을 기억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회보, 제620호 (2021년 5-6월호), pp.79-83.

5)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563.

6)  Dietrich Bonhoeffer, Ethics (New York: Macmillan, 1964), p.6

7)  https://www.yna.co.kr/view/AKR20210512168200076?input=1195m.

8)  요 12:43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표준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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