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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부활절(3-1) - " 나는 양의 목자요, 양의 문이다 " / 장애인-4.19혁명기념주일 / 이순태 목사

관리자 2021-04-14 (수) 17:03 3년전 579  

본문) 요10:1-18, 겔34:11-16, 히13:7-10,20-21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업과 관련하여서 ‘반유목민들’(semi-nomads)로 불리었다. 즉 오직 양만 키운 것이 아니라, 계절에 따라 농사를 지으면서 또한 양을 키우는 일을 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인 배경 때문에 성경에는 양과 목자의 비유가 자주 등장한다. 시편 23:1절에서도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다윗은 자신을 양으로 하나님을 목자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간 우리는 양과 목자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먼저 성경은 우리 인생을 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양이라 할 때 그 말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 양! 하면 평화를 연상한다. 푸른 초장에서 풀을 뜯는 양들의 모습이야말로 평화, 그 자체이다. 그러나 양 그 자체는 평화를 상징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동물이다. 양은 세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양은 길을 찾지 못한다. 방향감각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가 인도해주지 않으면 실종될 수 밖에 없다. 

  둘째, 양은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 못한다. 길을 찾지 못하기에 먹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가 먹이를 책임져 주지 않으면 굶어죽기 십상이다. 

  셋째, 양은 자기 생명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 걸음걸이가 빠르지도 않고, 다른 동물처럼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도 없다. 게다가 머리에 있는 뿔도 뒤로 감겨져 있어서 맹수의 공격에는 속수무책이다. 

  다윗이 자신을 양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바른 길을 찾을 수 없는 무능한 존재,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참된 양식을 구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 자신의 힘만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분이 강원도 예수원에서 양털을 깎는 일에 참여하였다가 느낀 글을 보면, 양은 느닷없이 소동을 피우는가 하면, 역겨운 냄새가 진동한다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오줌과 똥을 싸기도 하고, 양털에는 고약한 냄새와 더러운 기름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두 번 다시는 양털 깎는 일로 자원봉사는 하고 싶지 않다고 회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들이 평화의 상징일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역겨움과 불결함을 마다 않고 닦아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목자이다. 

 

2. 예수님 양의 목자이시다. 

  요한복음 10:2-3,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 우리는 양이고 예수님은 목자이시다.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먼저 우리를 지명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개별적으로 불러 인도해주신다. 이름을 불러 주신다는 것은 목자와 양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진리를 모르고 열심만으로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울을 찾아오셔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찾아오시어 그의 이름을 친히 불러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하여 숲속에 숨어 두려움에 떨던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그 이름을 불러주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화려한 왕자의 자리도 잃고, 미디안 광야에서 절망에 빠진 모세를 주님은 찾아오셔서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불의한 돈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던 삭개오를 찾아오셔서 주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겠다.” ··· 그렇게 개개인의 이름을 부르신 그 주님이 또한 오늘 우리의 이름을 개별적으로 불러 주고 계신다.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길 축원한다. 

 

 

 

  에스겔 34:11절 이하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양들을 대하시는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흐리고 캄캄한 날’(겔 34:12), 곧 주전 587년 유다에 닥친 심판의 날에 뿔뿔히 흩어졌다. 그런데 목자이신 하나님께 당신의 백성을 흩어진 모든 곳에서 건져내신다. 흩어진 양들을 만민 가운데서 끌어내며 본토로 데리고 오신다(겔 34:13). 그리고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신다. 

 

  그런데 요한복음 10:1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10:17절에서 한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때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선한’이란 형용사를 사용하신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자기의 이익만 따지는 삯꾼과는 달리 희생과 대속물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3. 또한 예수님은 양의 문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7절에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중동지방에서는 목자와 양들이 들판에서 야숙을 한다. 일단 야숙지가 결정되면 목자는 양들이 무사히 밤을 지낼 수 있도록 가설 우리를 만든다. 대개의 경우 주위에 흩어져 있는 돌을 쌓아 올려 담을 치는 형식인데, 특이한 것은 출입구에 따로 문을 달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목자 자신이 출입구에 누워 스스로 문이 된다. 그래서 밤사이에 도둑이나 맹수가 그 목자를 넘지 않고는 양을 끌고 갈 수 없게 한다. 이처럼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고 양들을 지키는 목자, 바로 양의 문이 있기에 양들은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과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뜻하고 있다.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연결통로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천국을 들어갈 수 있는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누구도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10:8절에서 특이한 말씀을 하신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누구를 가리키시는 건가? 모세? 예언자? 세례요한? 아니다. 하나님의 위탁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소식을 전한다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배경에는 신구약중간기에 형성된 수전절이 있다. 

 

  수전절은 구약에는 나오지 않고 외경인 마카비서에 언급되어 있다. 주전 2세기 시리아의 왕 안티오커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제단을 세우는 일로 인해 성전을 더럽혔다. 이에 유다 지파에 속한 마카비를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드디어 주전 164년 9월 25일에 성전을 탈환하고 제단을 회복하였다. 바로 이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수전절인데, 이 시기가 되면 유대인들은 당시 권력에 추종한 거짓되고 타락한 성전 지도자들을 기억하였다. 주님은 이런 거짓 목자들을 절도, 강도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인생의 출입구에서 친히 문이 되어 주셨다. 당신의 생명을 버림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육신의 부모는 때가 되면 우리 곁을 떠나지만, 주님은 영원토록 내 곁에 계셔서 나의 생명을 책임져 주신다. 

 

4. 예수님은 우리 양들의 큰 목자이시다(히 13:20). 또한 그분은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시다(히 13:8).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힘들고 막막한가? 그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은 양의 문으로, 선한 목자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절대 잊지 말라. 아무리 기도해도 주님이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 같은가? 그러나 주님은 다 듣고 계신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모르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던지신 그분이신데 어찌 우리의 어려움을 수수방관하시겠는가?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의 어려움 속에서도 더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 주님의 섭리와 은총을 믿으라! 믿고 견디는 자에게 풍성한 열매가 있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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