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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부활절(2-1) - "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라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1-04-09 (금) 08:49 2년전 597  

본문) 민 9:15-23, 행 26:1-23, 요 9:1-11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이 사람은 도무지 볼 수가 없습니다. 봄이 되면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없지요. 여릿여릿 움터 오르는 새순이 얼마나 숨 막히게 고운지, 아침 햇살을 쪼아대며 재잘대는 작은 새들은 또 얼마나 환장하게 예쁜지 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친구의 따뜻한 표정도 못 봅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으니, 상상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요. 그는 그렇게 깜깜한 암흑 속에, 고통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눈먼 사람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니까, 신앙인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제자들이 이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무슨 말입니까?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분명 죄 때문인데, 그것이 그 자신의 죄 때문이냐,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이야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눈이 멀었으니,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 태 속에서 죄를 지을 일은 없었을 테니, 그의 부모가 죄를 지었지 않겠느냐, 이 말이지요. 과연 이 사람이 눈먼 것은 누구의 죄일까요?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의 질문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불행과 고통에는, 그것이 질병이든 재난이든, 인재든 천재든, 먼저 그 사람이 지은 죄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말하지요. ‘인과응보’란 무엇입니까? 어떤 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는 좋은 결과가 따르고, 나쁜 일에는 나쁜 결과가 있다는 말이지요. 인과응보 사상은 불교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종교의 기본입니다. 사실 인과응보는 종교뿐 아니라 과학의 기본이기도 하지요. 과학도 결국 원인과 결과를 찾는 것 아닙니까? 인과응보는 특별히 유대교의 아주 중요한 기본 사상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사람의 죗값으로 그 자손 삼사 대까지 벌을 받는다(출 20:5)는 말이 나오지요. 물론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맹신하면 안 되겠지만, 인과응보가 구약성서의 중요한 기본 사상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눈먼 사람을 두고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의 불행, 그 사람의 고통은 죄 때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두고, 자기 신앙의 교리나 자기 신념의 잣대를 함부로 들이대지 말라는 말입니다. 특히 믿는 사람일수록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목사는 열배 백배 더 조심해야 합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하지요. 우리가 믿는 교리, 우리의 확고한 신념은 자칫 잘못하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본래 ‘인과응보’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가위가 아니라 나 자신을 성찰하는 거울 같은 것입니다. 나를 엄하게 성찰하고, 나의 허물을 깨달아 아프게 돌이키고, 나를 다시 바르게 세우는 기초입니다. 나의 눈의 들보를 보는 거울이지 남의 눈의 티를 확대해서 색출해내는 현미경이 아닙니다. 나를 성찰하는 인과응보의 칼날은 예리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휘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문제는 무엇보다 자기 신앙의 척도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한 고통당하는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한 사람의 고통에서 죄를 보지 말아야 한다면, 거기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 눈먼 사람의 고통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눈먼 사람을 두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죄’를 색출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눈먼 것은 그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자신의 죄도 그의 부모의 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가 눈먼 사람이든 귀먹은 사람이든, 병든 사람이면 누구나 죄인이라고 정죄했지요. 그들은 고통당하는 병자들을 부정한 죄인이라고 판결하고 배타하고 혐오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뜨거운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그 눈먼 사람에게서 죄를 찾으려 했지요.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 눈먼 사람에게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눈먼 사람에게서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그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 그래서 그 일을 이루시려는 것,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을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이었습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바라시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드러내시려 합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가 다시 빛을 볼 수 있도록, 그의 눈을 밝혀주려 하십니다. 그의 눈을 밝혀주어서, 그를 그 혹독한 고통의 나락으로부터 밝은 빛으로 구원하시려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날에 사람을 흙으로 빚으셨듯이, 침으로 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른 다음,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보내셨지요. 그 눈먼 사람은 가서 그의 눈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바라시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도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고통스러운 사람을 정죄하고 배척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정죄하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인 또한 죄를 들춰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진짜 눈먼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죄를 보는 밝은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보는 눈입니다.


눈이 멀고서야 보이는

사울은 본래 눈이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 중의 히브리로 좋은 혈통에다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에 통달했으니, 지식의 눈도 밝았지요. 바리새파 중에서도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 지도자가 될 만큼 열정도 남달랐습니다. 그렇게 눈 밝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색출해서 옥에 가두고, 형벌을 가해서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무엇보다 사울은 그 길이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 그리스도인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극도에 달해서, 유대 지역뿐 아니라 이방 지역까지 쳐들어가서 그들을 박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정말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신념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집하는 맹신에 빠지면, 그리스도를 핍박하면서도 그것을 도무지 모르는 청맹과니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게 다메섹 길로 달려가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해보다 더 밝고 눈부신 빛이었습니다. 사울은 그 빛 때문에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행 22:11) 자기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한 음성이 들려왔지요.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자신이 핍박하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자기 눈이 멀고서야, 자기 맹신을 깨뜨리고서야, 사울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의 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눈이 멀고서야 진짜 그의 눈이 열렸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생각과 자기 신념의 눈으로 보았다면, 이후로는 다만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열어주는(18절) 사도가 되었지요. 쉬운 길보다는 어렵고 험한 길로 가야 하고, 죄수처럼 결박당하고 옥에 갇혀야 하는 고난의 길이었지만, 그러나 바울은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성령이 이끄시는 길로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의 구름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갔지요. 그런데 그들은 지중해 해변을 따라가는 가깝고 편한 길이 아니라, 시내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시내 광야는 사막같이 척박하고 거친 땅입니다. 낮에는 해가 뜨겁고 밤에는 달이 차가운, 위험한 길입니다. 시편의 시인도 ‘낮의 햇빛도 너를 해치지 못하며, 밤의 달빛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시 121:6)이라고 노래했지요. 더구나 먹을 양식을 얻을 수 없고, 마실 물도 찾기 힘든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거친 광야 길을 40년 동안이나 헤매야 했습니다. 한 세대가 다 지나가는 오랜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혹독한 광야를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민수기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그 광야 길을 갈 수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길에서 ‘성막’을 세웠습니다. 이름 그대로 거룩한 장막입니다. 광야에서는 한 장소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움직여야 했지요. 그래서 성전을 지을 수는 없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진을 치고 머무는 곳에 성막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 성막 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이집트의 신전에는 수많은 신의 형상/우상이 안치되어 있었지요. 훗날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유배당했을 때도, 바빌론의 신전에는 나무나 돌로 깎아 만든 신상/우상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고대에는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로 신전에 자신들이 믿는 신의 형상을 안치했습니다. 신상이 없는 신전은 상상할 수 없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성막에 그 어떤 신상도 안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형상도 만들거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성막 안에 신상이 아니라 ‘언약궤’를 두었습니다. ‘우상’이 아니라 ‘말씀’을 중심에 둔 것입니다.

이렇게 성막을 세우고 그 안에 ‘말씀’을 두자, 그 위로 구름이 내려와 덮었습니다. 저녁이 되면 그 구름이 불처럼 보였고, 아침까지 그렇게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막을 덮고 있던 구름이 걷혀서 올라가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것을 보고 길을 떠났습니다. 다시 구름이 내려와 머물면 다시 그 자리에 진을 쳤지요. 이스라엘 자손은 그렇게 구름이 머무르면 같이 머물고, 구름이 오르면 따라서 떠났습니다. 구름이 오래 머물면 몇 날이고 몇 달이고 거기 머물렀고, 구름이 걷히면 즉시 길을 떠났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을 따라 머물고 떠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을 숭배하기라도 했다는 말일까요? 아니지요.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둔 성막에 함께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구름이 떠오르면 떠나고 내리면 머무른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만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머물고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험하고 거친 광야 길을 다만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바라보며 걸어갔습니다. 구원의 길을 다만 하나님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거칠고 위험할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만 바라보며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정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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