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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부활절(3-1) - " 예수의 빛을 받은 목자들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18-04-13 (금) 08:22 6년전 2537  

복음) 요10:1-18, 겔34:11-16, 히13:7-10,20-21  / 장애우, 4.19혁명기념주일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그의 사람들을 찾아 가실 때, 빛으로 찾고 만나주시면서 그들의 삶에 소명(召命)까지 부여해 주시고 계심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주시는 세 본문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오십니까? 목자(牧者)의 모습입니다. 그의 백성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은 목자로 찾아오심을 알리십니다. 

 

구약의 에스겔서에서의 하나님은 전쟁 참화(慘禍)를 당해서 세계에 흩어진 그의 백성들을 찾고 찾아서 그 본토로 데리고 오셔서, 그 양떼를 회복하게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요한복음서의 내용은 우리에게도 아주 널리 알려진 내용으로서, 우리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심을 집중해서 알린 곳입니다. 히브리서는 양들의 큰 목자이신(20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교회의 사역자들이 양무리들의 좋은 본을 보여야 됨을 권하시는 말씀입니다. 

 

목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단순히, 들녘의 양떼들을 치는 목동들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공동체나 백성의 지도자를 품위 있게 통칭(通稱)하는 표현입니다.

 

목자에게는 양떼나 백성이 맡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양떼를 대표하고, 양떼를 이끌며, 양떼에 책임을 집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에게는 양떼나 백성과의 동반자적(同伴者的) 관계가 맺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결코, 양떼의 형편을 무시한 목자의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행보(行步)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목자도 두 종류(種類)가 있음을 밝힙니다. 나쁜(악한) 목자와 좋은(선한) 목자입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은 나쁜 왕들과 종교 지도자들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종교에 빠지고, 하나님 보다는 외국의 강대국에 매달리며, 정의와 공의보다는 부정부패로 불의를 일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역시, 그런 잘못된 목자들을 견제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편에 서서, 이권이나 권력에 편승(便乘)하므로서 시대를 흑암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그 바람에 나라가 망했고, 강대국에 포로(捕虜)가 되어 끌려들어갔으며, 백성들이 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에스겔 예언의 말씀은, 그런 불행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제는 하나님 자신이 잃어버린 자, 쫓기는 자, 상한 자, 병든 자들을 찾아내어서 돌아오게 하는 선(善)한 목자로 직접 나설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악한 목자들의 행태가 계속 이어져 오다가, 예수님 때에까지도 오히려 심화(深化)되면서, 종교가 권력과 물질 중심의 집단으로 변질되고 타락(墮落)하게 하였고, 특히 율법주의 적 시각으로 모든 백성들을 죄인과 의인으로 편(便)가르기 하면서 생명과 구원이 없는 흑암의 세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와 같이 전혀 다른 차원의 선(善)하고 좋은 목자의 등장(登場)이 없이는, 도무지 이 세상엔 희망(希望)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오심은 에스겔 선지자가 일찍이 예언했던 선한 목자 하나님의 오시리라는 예언을 성취(成就)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여러 차례, 당신의 존재에 대하여 이렇게 강조(强調)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11,14절)

 

그러면, 선한 목자의 기준(基準)은 무엇입니까? 어떤 목자를 선한 목자, 좋은 목자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직접 제시하신 기준을 보면, 나쁜(惡) 목자는 양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자입니다. 소위, 양 자체를 위해 일하는 자가 아니라 품삯을 위해 일하는 삯꾼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과정에서 조금만 자기에게 손해(損害)되거나 불편해지면 등을 돌리고 맙니다. 사나운 이리가 오면, 언제든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무리들입니다(12절).

 

하지만, 선한 목자는 자기 이익 중심이 아니라 양떼를 위하여 일합니다. 양떼의 유익과 생명의 풍성함을 목표하며 일합니다. 자신의 이익 보다는, 양떼의 유익을 더 추구합니다. 그를 위하여, 필요하면 자신의 모든 것도 다 던집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도 버립니다(11,15,17,18절). 결코 책임에서 도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이스라엘에서 선한 목자의 표상이 있었나요? 그 모델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목자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했던 인물은 베들레헴의 양치기였던 ‘소년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거친 목장이란 현장(現場)에서 매우 선한 목자의 치열했던 모습을 잘 보여 준 인물이었습니다. 사자와 곰이 자기의 양떼를 공격할 때, 결코 물러나지 않았고, 맞서 싸우며 사자의 입도 찢으며 싸워서 자기의 양들을 지켜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사게 된 모습이었고, 후에는 그에게 이스라엘의 목자인 왕이 되게 하신 이유가 되었습니다(대상17:7-8,시78:70-72참조). 

 

그러기에 다윗은 예수의 조상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 역시, 당신이 구원(救援)할 양떼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버리는 점을 유난히 강조하기도 하셨고요! 누군들, 자기 목숨 버리는 일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부활 신앙을 제대로 가진 이들은 그 일을 기꺼이 합니다. 예수께서 직접 그런 취지의 말씀을 피력하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7절)

 

예수께서는 그의 목숨을 내어 놓으심으로서, 우리가 섬길 성전과 제단을 아예 십자가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자신을 제물로 내어 놓고 죽임 당하심으로서, 모두를 살려내는 십자가의 구원의 종교를 창설(創設)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 전통의 장막 성전 중심의 제사의 굴레에서 우리를 완전히 벗어나게 하셨습니다(9절). 제사 종교가 주는 엄격한 음식 규정들을 넘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피의 제사만으로도 우리가 생명(生命)을 얻고 누리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가 자신의 목숨을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버리시자, 그를 죽음에서 살려내신 하나님은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삼으시면서, 그 아들의 피의 은혜를 받고 또 믿는 자들까지도 모두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히13:20).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은 그 때부터 당신이 ‘평화(平和)의 하나님’이요, ‘평화의 목자’이심을 온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따르게 된 모든 이들은 그 예수를 우리의 ‘큰 목자’로 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전적으로 평화(에이레네)의 하나님이십니다(20절). 싸움이나, 보복이나, 전쟁의 하나님의 아니십니다! 랍비문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평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의 평화의 능력은 어디에서 더욱 드러났습니까?

 

1)구약 에스겔서를 보면(16절), 힘없어서 당하여, 온 세상에 흩어지고, 짓밟히고, 빼앗기고, 무시당하고, 병들어 신음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찾아가 되찾아 오게 하시고, 회복(回復)시키시는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2)복음서에서 보면, 그 하나님은 강도와 절도의 위험 아래 있는 모든 광야의 양들과 함께 사시고 생명을 나누며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요10:1-6). 그래서 목숨을 걸고, 당신의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악한 세력들과도 싸울 줄 알았던 선한 목자였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평화는 당신의 양떼들만을 위한 돌봄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우리에 들지 아니한 모든 다른 양들을 위한 목자도 되셨기 때문입니다(16절). 이것은 선한 목자의 예수님의 품이 유대인만을 넘어서, 그의 음성을 듣고 믿고 따른 온 세상 모든 만민들까지도 그의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예고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바람에 우리같은 비유대인들도 그의 한없이 베푸시는 평화와 사랑의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마치, 모든 햇빛과 비를 온 누리의 생명체들이 동일하게 받아 누리며 살아가듯이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예수를 이렇게 선언합니다(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평화의 주님의 동일성과 영원성을 그렇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고백의 원칙 위에 우리 교회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대 교회의 결정적인 신앙고백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 생명의 주이시며, 온 세상의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당시 아주 혁명적이었습니다. 로마 체제 아래에서, 황제 신을 강요받는 체제 아래에서 ‘예수가 주이시다’는 고백은 불순분자들의 고백과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로 그 하나의 고백 때문에, 그런 증언을 고수하기 위하여,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 고귀한 목숨을 다 내어 놓았습니다. 히13:7절의 배경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선한 목자, 평화의 목자를 모시고 살며, 또 그를 섬겨온 이들에게는 후배 된 우리들은 이제 어떤 삶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1)그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고 선포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유일하신 경배를 받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2)우리의 선행(善行)을 그에게 제물로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의 경배자들로서, 그를 닮은 자들로서의 또 다른 작은 목자의 모습으로 그의 목장들을 굳세게 지켜내면서, 그에게 산 제물을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롬12:1-2참조). 

 

마침 이달 4월27일은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됩니다. 실로 평화 정착을 위한 역사적인 만남입니다. 남북 충돌의 긴장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가 정착되게 뜨겁게 기도합시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평화입니다! 평화란 진짜 비싼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이, ‘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와 화해의 하나님’이시다는 이름을 알리기 위하여 취하신 행동과 댓가(代價)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제물로 내어 놓으신 일이었습니다! 아들까지 제물로 내어 놓으시면서, 죄인들과 어둔 세상과 화해하고 평화하시려고 노력하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만큼, 평화는 얻기가 힘들며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와 신뢰를 사기 위하여, 거기에 걸 맞는 대가(代價)와 희생(犧牲)도 치룰 수 있어야 합니다. 주는 것이 힘입니다. 마음과 신뢰를 살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하려고 해야 됩니다.큰 것을 얻으면, 그 밑의 작은 것들은 금방 따라옵니다. 남북 정상 두 사람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평화의 영과 지혜가 임하도록 뜨겁게 기도합시다. 

 

우리나라도 지금 정계나 교계 모두 나쁜 목자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위해 행진하고 있습니다. 이런 새 출발은 바로 우리부터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현장에서부터 선한 목자의 직임을 잘 수행합시다. 내가 맡은 직분에서, 내가 돌보는 가족과 자손들에게, 나와 관계하는 모든 이웃들에게, 내가 섬길 우리 조국과 나라에게, 선한 목자가 되고, 평화의 일꾼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평화와 구원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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