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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4-2) - " 디베랴 바다에서 " / 서재경 목사 >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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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부활절(4-2) - " 디베랴 바다에서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0-04-30 (목) 14:03 3년전 1677  

본문) 사 63:7-14, 행 13:26-35, 요 21장 1-14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사 63:9)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습니다.(요 21:13)

I.

요즘처럼 마음이 답답할 때는 한번 바다로 나가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기왕이면 동해가 좋겠지요. 막히는 것 하나 없이 확 트인 너른 바다를 보면 마음도 확 트이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 연휴에는 많은 사람이 동해를 찾는다고 하니 코로나 방역지침은 잘 따라야겠지요. ‘바다’라는 말이 다 ‘받아’ 준다는 뜻이 있다고도 합니다. 바다는 답답하고 지친 마음을 다 받아주고 위로해 줍니다.      

 

그런데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바다는 어떤 곳일까요? 바다는 일상이요 생계의 터전이겠지요. 또 바다에는 거친 파도가 일지요. 위험한 곳입니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일은 언제 어떤 위험을 당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엄청난 해일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바다는 공포의 장소가 되겠지요. 옛사람들에게 바다는 괴물과 유령이 나타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성서에서 바다는 낭만의 장소도 위로의 장소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와 친숙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단지 그들이 바다를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막바지에 이르러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보여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니, 이전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지요. 그런데 이전의 하늘과 땅과 함께 또 한 가지 없어진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바다입니다.(계 21:1) 바다가 없어집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때 바다도 없어졌다고 하는 것은, 바다 그 자체가 악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바다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지요. 천국에 바다가 없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사탄의 하수인 괴물 짐승들이 올라온 곳입니다.(13장) 바다는 사탄의 근거지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그들을 가로막은 것도 바로 바다, 홍해입니다. 바다는 출애굽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또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게 했던 불레셋도 바다를 건너온 족속입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로마도 바다에서 올라왔습니다.

 

II.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디에 나타나셨나요? 바다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 ‘디베랴 바다’입니다. 이 디베랴 바다는 어떤 곳일까요?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 것일까요? 

 

우선 먼저 주목할 것은 ‘디베랴 바다’라는 이름입니다. 디베랴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 이름이지요. 주후 25년경에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호수 남서쪽에 건설해서,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봉헌한 도시입니다. 티베리우스는 ‘피를 부르는 자’ ‘술고래’ ‘변태’(숫염소) 같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요. 이 별명들은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가늠하게 합니다. 이 디베랴는 갈릴리 지역에서 중심이 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본래 갈릴리 호수는 수금을 닮았다고 해서 ‘긴네렛 호수’라고 불리기도 하고 ‘겐네사렛 호수’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호수가 후에 ‘디베랴 바다’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 갈릴리 호수가 언제부터 디베랴 바다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공관복음서들이 갈릴리 호수(또는 바다)라고 기록하는데, 복음서 중에 가장 후대의 기록인 요한복음만 디베랴 바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디베랴 바다라고 부르게 된 것은 상당히 후대였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요한복음을 기록할 즈음에는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지명이 달라진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디베랴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요한복음은 디베랴 바다가 곧 ‘갈릴리 바다’라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갈릴리 바다라는 이름과 디베랴 바다라는 이름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6장에서 ‘갈릴리 바다’라고 쓴 요한이 마지막 장인 21장에서 굳이 ‘디베랴 바다’라고 쓰는 것은, 그냥 무심코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이 이렇게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바다’라고 쓰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요한에게, 그리고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디베랴 바다’하면 어떤 느낌일까요? 예전에 우리나라를 일제가 강점했었지요. 그들이 우리의 땅을 빼앗고 나서, 그리고 우리 백성을 빼앗고 나서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이름을 빼앗았습니다. 우리가 본래 부르던 땅의 이름을 다 바꾸었지요. 그러고 나서는 사람 이름까지 바꾸었습니다. 다까끼 마사오라고 스스로 이름을 바꾼 자도 있었지요. 그런데 왜 제국의 지배자들은 그렇게 이름을 바꿀까요? 그 정신을, 그 영혼을 완전히 지배하고 착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존재를, 그 존재의 근거를 통째로 강탈하는 것이 바로 이름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땅이 조선 땅이 아니다, 이제 너희는 조선 백성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이름을 빼앗긴 사람은 존재를 빼앗긴 것입니다. 이름을 빼앗긴 땅은 봄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디베랴 바다라는 이름은 나라가 완전히 사라지고 땅의 이름도 사람의 이름도 다 빼앗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디베랴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도시”입니다. ‘예수님을 빼앗긴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만났었지요.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들을 부르셨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 갈릴리 들판에서 말씀을 가르쳐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은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차올랐지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실 때 얼마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까? 병자들을 어루만지시고 고쳐주실 때는 또 얼마나 가슴이 벅찼습니까?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모두 함께 배불리 먹었을 때는 또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님을 빼앗겼습니다. 로마에 빌붙은 제사장과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넘겨주었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대리자인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시고, 깜깜한 돌무덤 속에 갇히셨지요. 이제 예수님은 그들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디베랴(티베리우스)가 예수님을 빼앗아갔습니다. 갈리리 바다는 이제 디베랴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참담한 마음으로 그들이 떠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온 곳은 이제 갈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이제 복음이 들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디베랴에서, 이제 그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의 꿈을 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희망도 다 부질없는 것이 되었지요. 그러니 다시 예전처럼 호구지책으로 물고기나 잡으려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요. 그렇지만, 물고기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빈 그물, 텅 빈 삶입니다. 

 

그런데 이 디베랴 바다에서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에게 어떤 분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디베랴 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전에 갈릴리 호수에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저분이 누구십니까? 그때에야 비로소 제자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함께하셨던 예수님은 지금 이 황망하고 절망스러운 디베랴 바다에도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 계신 예수님이 놀랍게도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디베랴 바다는 이제 예수님이 없는, 하나님 부재의 장소가 아닙니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지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생선을 몇 마리 굽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생선과 빵도 가져오라 하셨지요. 예수님은 그 빵과 물고기를 집어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자, 그들의 빈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니, 그들은 다시 함께 빵을 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디베랴 바다는 이제 절망의 바다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희망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소명으로 일어나서 새롭게 시작할 것입니다.

 

III.

오늘 우리는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한 말씀도 함께 읽었습니다. 이사야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바빌론이란 어떤 곳일까요? 괴롭고 힘든 곳이지요. 참담하고 절망적인 장소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이지요. 마치 디베랴 바다처럼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무엇보다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땅입니다. 그래서 더욱 절망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고난의 장소에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절규합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셨던 하나님, 그 백성을 바다로부터 올라오게 한 그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11절)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바다’는 이스라엘을 가로막는 장애물과 같은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날 때 그들의 길을 가로막은 것이 홍해 바다였듯이, 바빌론으로부터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제2의 포로 해방을 가로막은 것도 바다였고, 로마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은 것도 바다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집트의 바다나 바빌론의 바다나 디베랴 바다는 모두 희망을 가로막는 바다이지요. 

 

이렇게 바빌론의 바다에 가로막힌 백성들은, 일찍이 그들과 함께하셔서, 그 바다의 물이 갈라지게 하시고(12절), 그들이 바다로부터 올라오게 하셔서, 그들의 이름이 빛나게 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느냐고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영을 넣어주시고(11절),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으며,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이 지금 어디 계시느냐고, 이스라엘 백성은 탄식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를 기억하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당신의 백성을 지으시고, 그 백성을 구원하시며, 그 백성을 이끄시는 하나님은 바로 ‘고난의 현장’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 친히 주님께서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9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당신의 백성을 친히 구원하시는 하나님, 천사들을 보내셔서 구원하시지 않고 친히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난받고 계십니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도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비록 그들이 이방 땅 바빌론에 있을지라도, 무섭고 험한 바다가 가로막을 때일지라도,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일찍이 시편 시인이 노래했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음부에 있을 때도 거기에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에 함께하시기에, 이제 그우리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바다를 능히 건널 수 있고, 그 험한 파도와 풍랑이 이는 깊은 바다를 말을 타고 광야를 달리듯(13절) 달려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하나님이 지켜주시기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절망과 고통 속에 함께하시기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희망의 확고한 근거이며, 우리의 희망의 변함없는 토대입니다. 

 

IV.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받는 그의 백성과 함께하셔서, 그의 백성을 지키시고 이끌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디베랴 바다에 함께하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새 희망을 주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고난받는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그것을 아는 것, 그것을 믿는 것, 그것을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셨다(행 13:30)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믿음입니다.

 

요즘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모두가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빈 그물을 끌어 올리면서 좌절하고 불안해합니다. 코로나는 어쩌면 디베랴 바다처럼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홍해처럼 우리를 가로막아 버렸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코로나가 더 견딜 수 없는 지구의 재채기일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재채기가 이 정도인데, 정작 기침을 하고 고열을 앓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코로나 19에서 인간의 폐렴도 보아야 하지만, 지구의 폐렴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구의 허파를 살려야 합니다. 피조물들이 아프다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자연을 향한 우리의 눈과 귀가 열려야,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의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큰 숙제지요. 무엇보다 우리의 아이들이 깨끗하고 건강한 지구에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이라면, 미래는 우리 어린이들의 것이라는 말이지요. 어린이들의 미래를 파괴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꿈꿀 수는 없습니다.

 

코로나19 이후에는 교회도 더 큰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따르지도 않는 우리의 불신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살아 계신 주님을 따르지 않고, 맘몬을 따르려는 우리의 탐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시고,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디베랴 바다에 사는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함께하신 예수님이 오늘의 디베랴를 살아가는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도 살아 계신 주님과 함께 일어나서, 주님과 함께, 그리고 우리가 함께 생명과 평화의 길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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