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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부활절(1-2) - " 지금 여기에 부활의 은총이 "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20-04-10 (금) 11:33 4년전 1574  

본문) 출 15:13-21, 고전 15:20-28, 요 20:1-10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시바다는 항상 인간에게 죽음과 절망을 안겨주는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인 셋째 날, 땅을 둘러 덮고 있는 저 원시의 바다에서 육지를 꺼내어 그 땅을 하나님이 창조하실 인간이 거주할 삶의 터전으로 삼으십니다. 바다는 인간을 안전하게 품어 줄 터전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 바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늘 그 길을 가로막고 위협하고 절망과 고통을 안겨주는 죽음의 세력이었습니다. 홍해바다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앞길을 가로막는 죽음의 세력이었고, 요단강은 40년의 고통스러운 광야생활을 마치고 저 가나안 땅, 새 하늘 새 땅에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을 가로막고 있는 악의 세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원시바다를 만드셨지만 그 원시바다에서 땅을 건져 올리심으로 창조를 완성해 가십니다.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지만 요단강을 가르시고 건너가게 하심으로 그 구원을 완성해 가십니다.


우리 시대의 바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자원을 공급해 주고 아름다운 풍경과 낭만적인 여행, 그리고 쉼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바다는 유사 이래 인류에게 수많은 사고로 인한 고통,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슬픔, 극복할 수 없는 재난을 가져다주는 절망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도 2010년 3월, 백령도 앞바다에서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된 사고로 우리나라를 수호하던 젊은 장병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직도 유족들의 가슴에 한으로 맺혀있는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사고로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을 포함하여 수백 명 바다에 수장되는 뼈아픈 고통과 아픔이 서려있는 곳도 바다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여름이 지나가면서 몰려오는 태풍은 항상 바다에서 몰려왔습니다. 한반도를 홍수로, 폭풍우로 휘감아 피땀 흘려 쌓아놓은 모든 재산을 하루아침에 쓸어가 버리고 농토를 황폐화시키는 재난도 늘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바다는 여전히 우리에게는 두려움과 절망을 안겨주는 죽음의 세력으로 존재합니다.


죽음의 바다를 생명의 길로(출15:13-21)


오늘 구약본문 출 15:13-21의 말씀은 죽음과 절망의 홍해바다를 건넌 후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이 그 구원의 은총을 소리 높여 찬양한 노래입니다. 참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거짓입니다. 인간의 욕망의 부활, 자기자랑과 자기성취의 부활에 이르고 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얼마 있지 않아 홍해 앞에 이르렀습니다. 목포 앞바다, 백령도 앞바다가 수많은 승객들과 어린 학생들, 해군의 피 끓는 장병들의 생명을 앗아간 죽음의 바다라면 출애굽한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있는 홍해바다는 그들을 산채로 수장시키려 하는 죽음의 바다요 다시 애굽의 노예로 돌이키게하는 절망의 바다였습니다. 피할 길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머문 곳은 바다와 인접한 광야의 끝, 곧 애굽 수비대가 있는 믹돌과 비하히롯 앞 그리고 바알스본 맞은편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그곳은 “독 안에 든 쥐”의 형국입니다.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그 옆은 애굽 수비대의 망대가 있는 믹돌, 그 반대편 비하히롯 앞 바알스본은 가장 험난한 장벽으로 가로막힌 지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믹돌에 주둔한 수비대의 보고로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이 홍해 앞에서 갇혀버린 것을 알았고(출14:3)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왔습니다. 위기일발입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우리는 바로 “홍해의 기적”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우리 앞에 가로막힌 홍해를 가르시고 기적 같은 구원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부르짖기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매우 순진하고 경솔한 착각입니다. 그 전에 우리가 해야만 할 중요한 핵심을 빠뜨리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샤머니즘신앙과 참 기독교 신앙이 갈립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선택입니다. 홍해바다의 죽음의 위기 앞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죽어도 저 애굽의 노예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 말씀에 순종하여 죽더라도 홍해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둘러 애굽 군대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차라리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사람을 섬길 것이라(출14:12)”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스스로 결단하여 바른 길 걸어온 것 아닙니다. 내가 결단하여 예수 믿는 것 아닙니다. 믿음이 선물임을 감사합시다. 보십시오! 모세가 나섭니다. 그는 바로에게 굴복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출14:15-16)”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위로 내밀 때, 애굽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야훼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홍해가 갈라졌고 죽음의 바다가 길을 내었습니다. 모세가 앞서고 백성은 그 뒤를 따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결단으로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다 에수 그리스도가 앞서셔서 우리와 함께 가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절대 절망의 바다를 여시고 이스라엘에게 새 출발의 길, 자유와 해방의 대로를 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은 온 인류를 파멸시키는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사망의 바다를 넘어 구원과 영생의 새로운 삶의 문을 여셨습니다. 우리를 대적했던 원수마귀 사망의 권세를 깨버리시고 사망의 권세아래 있던 우리를 건져내셔서 새로운 삶으로의 출발의 길이요 자유와 해방, 승리와 축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무덤 문을 여신 주님(요20:1-10)


오늘 복음서의 말씀 요20:1-10은 유사 이래 그 누구도 열수 없었던 죽음과 사망의 문을 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참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성취되었습니다. 온 땅과 자연은 부활의 흔적들로 가득합니다. 봄은 겨우내 죽었던 것들로부터 소생한 생명의 용솟움으로 가득합니다. 이 역사에도 부활이 있습니다. 역사의 변곡점마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의 피가 흘려져왔고 그 정신은 죽지 않고 다시 되살아나서 이 타락한 역사와 문화를 늘 새롭게 하는 에너지가 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참 부활, 완전한 부활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부활의 사건은 유일무이한 사건이요 온 우주의 재창조의 사건이며 결국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완성하는 궁극적인 사건입니다. 에수의 부활은 이와 유사한 수많은 부활현상들과 부활사상들을 우주적으로 완성할 뿐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역사로 통합시키시는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무덤은 온 인류의 종착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 저주와 파멸의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심으로 오히려 사망의 권세를 꺾어버리시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의 길을 여셨습니다. 누구도 열 수 없었던 무덤의 문을 여시고 그 누구도 벗어버릴 수 없었던 수의를 벗어버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수의를 입고 무덤으로 향하던 우리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무덤에 가보니 여인들의 보고처럼 무덤 문은 열려 있고 텅 비어있습니다.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몸에 입혔던 수위는 그 자리에 있고 그 머리를 감쌌던 수건은 마치 나방이 누에고치를 빠져 나간 것처럼 싸맸던 형체 그대로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간 것도 아니고 잠시 기절했다가 깬 사람이 수의를 벗고 머리를 싼 천을 풀어 헤치고 나간 것도 아닙니다. 그제야 그곳에 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요한사도는 자신이 목격한 예수님의 부활을 이처럼 사실적으로 주밀하게 묘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부활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자의 부활이야말로 이 사망과 죽음의 세상에서 우리에게 궁극적인 소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뿐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가 다시 오시는 마지막 날 또한 그의 몸인 교회와 그의 백성들에게 부활의 몸을 입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죽음으로 가득한 이 땅을 살리시고 회복시키십니다.


이 시대의 무덤은 곧 “죽음의 문화”입니다. 이 시대를 덮고 있는 사망과 죽음의 문화, 온 인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 무서운 “죽음의 문화”가 썩은 악취를 내뿜고 있습니다. 코로나 19의 위기는 아마도 그 재난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인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우리의 문명은 ‘인간 중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이해하고,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다른 생명들을 정복하고 파괴하며 수단화하며 살아왔습니다. 모든 자연과 생물은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존재합니다. 생명은 유기적인 것입니다. 하나입니다. 하나가 죽으면 모두가 죽습니다. 하나가 오염되면 모두가 오염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문명은 서로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문화입니다. 무엇보다 온 우주를 잘 관리해야할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파기하고 인간의 자기 중심문화를 세워져왔습니다. 그 결과 부메랑이 되어 돌아 온 것이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입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생태계는 완전히 질서를 잃고, 자기 터에서 살아가야 하는 박테리아, 바이러스들이 인간과 접촉되어 재앙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코로나바이러스 방역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만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의 인간 중심의 문화, 이기적인 탐욕의 문화에서 스스로 돌이키지 않고 계속 무절제와 탐욕의 길을 달려간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또 다른, 더 큰 비극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삽니다. 탐욕을 버려야 삽니다. 예수 생명으로 다시 살아야 세계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예수부활 나의 부활(고전15:20-28)


부활절에 주시는 서신서의 말씀인 고전 15:20-28은 바울의 부활메시지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의 상관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첫째는 예수의 부활은 이미 창조 때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으리라” 우리도 창조 때 부터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따라 부활할 것입니다.(13절) 둘째는 예수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20절) 첫 열매는 맨 먼저 돋아난 열매로서 잠시 후 모든 곡식이 결실할 것에 대한 예고요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부활의 가장 확실한 보증이십니다. 셋째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회복 때문입니다.(23-28절)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절차가 있는데 먼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이 이루어지고 그 다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부활로 이어지며 그 후,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악한 권세들을 멸하시고 맨 나중은 사망을 멸하심으로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 나라의 대적인 사망까지도 멸하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성도의 부활을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넷째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기 때문입니다.(22절)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에게서 나온 그의 모든 후손이 다 죄인이 된 것처럼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생명 가운데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만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주님과 연합하여 지금 여기에서 부활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부활절에 성만찬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감염방지를 위해 처음으로 모이는 공예배 대신 온라인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교회력에 따른 매 절기마다 가졌던 성만찬을 이번 부활주일에 갖지 못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드리는 예배 같아서 허전합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지금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거룩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이번 성만찬을 거름으로 인해 우리에게 유익한 점은 없을까? 생각하다 아! 이번에 우리가 성만찬을 연기(?)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미시(Amish/ 메노나이트 소속 교회)에서 시행하는 성만찬에 관한 글을 읽다가 이번 성만찬은 연기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 좋은 성만찬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mish의 예배는 사순절 기간이 끝나고 부활절 성찬 주일의 성찬식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목사는 사순절 기간에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원한을 버리라고 권고하는데,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고 교인들 사이에 용서와 화해가 충분히 일어났다고 판단되지 않으면 교회 지도부는 몇 주에서 몇 달간 성찬식을 연기한다고 합니다. 성찬 전날, 성도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에 대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성찬을 준비하면서 불안하게 하고 괴롭히는 자신의 구체적인 죄, 하나님만 아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형제들끼리 죄를 고백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선포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 후에 비로소 진행되는 성찬식은 주일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예배하는데 휴식 시간 없이 진행되고, 점심때는 교대로 몇 사람씩 옆방에서 식사합니다. 그들은 장례식 때 부른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아 마지막을 생각하라 내 죽음을 생각하라 죽음은 항상 빨리 오는 법 오늘 힘이 넘쳐 건강한 사람도

아마도 내일이나 더 빨리 사라질 수 있다네"


그리고 공적인 죄의 고백을 시작합니다. 죄의 고백은 그리스도 이름으로 행하는 거룩한 '만찬'에 함께 임하는 준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 그리고 사람들과 화해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찬을 받는 날이 그리스도인의 사귐에서 즐거움의 날이 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형제와 화해함으로써 성도의 모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와 동시에 용서의 새 생명과 구원을 받습니다. 성도의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주의 식탁에서 몸과 피로 하나가 되듯,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함께 있으며 이로써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서 누리는 기쁨은 절정에 다다르게 되어 말씀 아래서 함께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례전으로 완성된다.“고 고백합니다. 교인들은 성찬식이 끝나면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세족식을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에 대한 죄의 고백과 용서 없이 성만찬에 참여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참으로 하나님이 친히 반 강제적으로 성만찬을 연기하도록 하신 이 기간에 참 성만찬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진정한 죄의 고백과 용서, 그리고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의 은밀한 죄까지도 서로 고백하며 용서를 선언함으로 하나님과 내 형제와 하나가되는 감격적인 성만찬,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주님과, 서로 용서함으로 하나 된 성도들과 함께 성만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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