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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부활절(2-1) - " 밤은 곧 온다 " / 김은승 목사

관리자 2018-04-03 (화) 23:01 6년전 2503  

본문)  요9:1-11, 민9:15-23, 행26:1-23 

 

수요일 성경공부를 하다가 이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신명기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앞으로 들어갈 축복의 땅 가나안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이집트 땅에서는 채소밭에 물을 줄 때, 씨를 뿌린 뒤에 발로 물을 댔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서는 산과 골짜기가 많아서 하늘에서 내린 빗물로 밭에 물을 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땅이 더 좋은 땅이겠습니까? 힘써 물을 댈 필요도 없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저절로 식물을 자라게 해 주는 땅이 훨씬 좋은 땅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돌려 생각하면, 언제라도 발로 물을 댈 수 있을 만큼 물이 풍부한 땅이 더 좋은 환경이 아니겠습니까? 산과 골짜기가 많은 땅, 그래서 하늘에서 비가 제 때에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땅은 척박한 땅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랑스럽게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은 이어 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몸소 돌보시는 땅”이기 때문에 축복의 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눈길이 해마다 정초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늘 보살펴 주시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살 수 있는 땅이기에 세상 사람들은 모두 원하지 않는 땅이라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몸소 도와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이런 땅을 기쁜 마음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요? 자기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믿음은 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인 것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참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시대를 살면서, 죽음에서 부활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힘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영광을 본 우리 성도들이 가야할 길은,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불신하고 불편해하는 그 길, 하나님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그 길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가 우리 안에 충만해서, 담대히 빛의 길로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구름 기둥에 의해 인도함을 받았던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막을 세우고 나자 구름이 그 성막을 덮었습니다. 낮이 되어 구름이 성막 위로 올라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보고 길을 떠났습니다. 구름이 내려와 머물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자리에 다시 진을 쳤습니다. 구름이 몇 달을 머물러 있어도 백성들은 함부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만 길을 떠났습니다. 

왜 성경은 이 사건을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이스라엘의 철저한 순종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철저한 보살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 죽음의 땅을 의미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대상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에게서만 도움이 온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깨우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암흑 같은 땅에서 하나님만이 빛이 되어주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은 경험했습니다. 구름이 불처럼 보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눈이 되어주셨고, 하나님이 친히 안내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약속의 땅으로 안내받았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금방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고, 자기 뜻대로 살았습니다. 고난의 세월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나라를 잃었습니다. 앗시리아에서부터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를 거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한 암흑 속에서 갈길을 잃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장님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이스라엘의 형편이 장님과도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보고하고 있는 사건 역시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게하는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먼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를 궁금해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구의 죄를 따질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통해 보여주실 하나님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이 사람을 눈 뜨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게 했습니다. 이 모두가 암흑 가운데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빛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니,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과 용서와 분노를 사람들은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세리를 불러 식탁에 앉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성전 장삿꾼의 상을 엎어버리는 분노도 하나님의 뜻이었고, 질병을 물리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으로 계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빛으로 비추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진리를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Tv에서 본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어느 부잣집 아이가 유괴 당했습니다. 유괴범의 요구대로 많은 돈을 전달하고 아이가 있는 곳을 연락받았습니다. 경찰은 로봇을 동원해서 아이가 갇혀있는 차량의 트렁크를 열려합니다. 폭탄이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장면을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습니다.  엄마는 애가 탑니다. 아이가 질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로봇이 고장 났습니다. 경찰은 빨리 부속품을 가져와서 고치라고 명령합니다. 엄마는 화가 나서 ‘아이가 질식할지도 모르는데 뭐하고 있느냐’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빠는 경찰들이 전문가이니 가만 기다리자고 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견디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뿌리치고 자동차로 달려갔습니다. 고장난 로봇을 밀어내고 직접 문을 열었습니다. 다행히도 폭탄은 설치되어있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무사히 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과연 엄마의 사랑은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자기 목숨을 걱정하지 않고 아이에게로 달려가는 엄마를 치켜세웁니다. 

 

사람들은 영화의 장면을 통해서는 사랑의 힘을 잘도 이해하면서, 저 우뚝 서있는 십자가에서는 왜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상징으로서의 십자가에서 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없다는 말입니까? 죽음 한 가운데에서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셨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어울리기를 두려워합니다. 사회가 지목한 죄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주지 못합니다. 죄만 볼 뿐 사람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악한 돈놀이의 판을 걷어찰 용기는 더더욱 없습니다. 선착순 놀음에 아둥바둥 앞자리를 차지하려합니다. 뒤쳐져 뛰지도 못하는 이들을 살펴볼 마음의 여유는 없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벌써 밤이 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밤이 곧 올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밤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맞이하실 십자가의 운명을 가리켜 밤이 곧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계시면 빛은 사라지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빛 없이 사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밝히 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 안에 빛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쳐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여전히 빛 속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세상이 여전히 그늘 속에 있는 것은 옛날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보여주었던 그 철저한 순종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루 먹을 만큼만의 만나를 거두어 들이는 일을 참 불안해합니다. 더 많이 거둔 것이 다음 날 썩어서 악취를 풍겼던 것과 똑같은 일이 우리들 냉장고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축복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채워져 있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거기에는 믿음이 차지할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솟아나는 불안과 바깥에서부터 다가오는 위협들이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빛 안에 있으면서도 빛으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이겨내도록 노력합시다. 걱정이 많으면 용기를 낼 수 없습니다. 걱정거리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언어학자 Noam Chomsky는 여러 나라의 정치적 약자들을 돕는 일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정치꾼들에게 이용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약자들을 지지하는 것을 거두지 않는 것은 그 일 자체가 옳은 일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세월호의 유가족을 면담하는 일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교황은 ‘유족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진실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의 악을 드러내는데 사용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난은 박해하는 사람의 무지와 사악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는 생명 불과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빛, 성령의 빛을 결코 꺼뜨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를 더 말씀드리고 정리하고자 합니다. 아이의 엄마가 가정에 관심 없는 남편 때문에 잠시 유혹이 왔습니다. 한 달 동안 아이를 통학시키는 일로 고용된 운전기사에게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아이엄마가 남자 주인공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여자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여자의 자리는 좋은 엄마, 가정을 지키는 현숙한 아내라는 것을 침묵으로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남자의 마음을 깨닫고 돌아섭니다. 그러면서 ‘내가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런 존중(respect)이었어요’ 하면서 고마워합니다. 

 

문득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 또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관계가 생각났습니다. 타락한 밀월관계가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도록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존감을 세워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지하는 신뢰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유혹이나 위협 앞에 당당할 때,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성도가 믿음 안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존귀케 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밤이 와서 우리 믿음이 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잃을 때 밤은 닥쳐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지켜나갈 때, 하나님의 축복은 불기둥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십자가로, 또 부활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밝은 빛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올라서, 밤을 물리치고 환한 낮의 인생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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