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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부활절(1-2) - "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 / 장효수 목사

관리자 2019-04-18 (목) 18:55 4년전 3328  

본문) 마가복음 15:42-16:8  욥기 19:23-27  고린도전서 15:1-11

 

1.1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 말씀 하셨던 것과 같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1.2 다시 사신 우리 주님,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여러분에게 기쁨과 감격으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이 여러분과 모든 가족들 그리고 세상에 전해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우리 모두를 그리고 세상을 감싸기를 바랍니다. 

 

1.3 우리 주님의 부활은 2000년 전 예루살렘에서뿐만이 아니라, 그 주님을 믿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주님을 믿고 영접하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모든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2.1 주님의 부활은 우리 기독교 믿음의 본질입니다. 알맹이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있었기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의 존재이유도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부활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2.2 주님의 부활을 전한다는 것은 이 천년 전에 죽은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살아나신 주님이시기에, 살아계신 주님이시기에, 지금도 그 예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3.1 안식일 다음날, 지금 주일새벽입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른 새벽 무덤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안식일에는 무덤을 찾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안식일이 끝나고 난 다음, 빨리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3.2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으니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마리아의 열심에 초점을 맞추면 박수를 쳐 줄 수 있지만, 마리아에게는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3.3 마리아는 지금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면서 어떤 모습의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까? 아니면 시신으로서의 예수님입니까? 아쉽게도 막달라 마리아는 시신을 찾으러 무덤에 간 것입니다. 

3.4 예수님께서 이전에 자신이 부활하실 것을 얼마나 자주 말씀하셨습니까?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요한11장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내가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아멘 했을지도 모릅니다. 

3.5 그런데도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러 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점입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하는 자리에 나올 때, 어떤 분을 만나러 옵니까? 

 

4.1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러 옵니까? 아니면 2천 년 전에 죽었던 시신 같은 예수님을 만나러 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지 않고, 2천 년 전의 예수님의 말씀만을 배우려고 하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죽어 시신 같은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것입니다. 

5.1 오늘 마가복음의 말씀은, 그리고 마태28, 누가 24장, 요한 20장의 공통점인 말씀은, 확신의 말씀은 동일하게 예수님이 사셨다는 것입니다. 

 

5.2 복음서보다 먼저 기록된 바울 서신은 예수 부활 사건을 더욱 선명하게 증언하면서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고백합니다.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베드로에게 그리고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며,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고, 야고보에게 나타나신 후, 모든 사도에게와 증언자인 바울에게 나타나셨다고 증언하며 예수님은 다시 사셨다고 선포합니다. (고전 15:3-8)

5.3 복음서가 증언하는 ‘다시 사셨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천년 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비한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고, 삼베로 싸서 무거운 돌문으로 무덤을 막았는데(막 15:42-46), 그 예수님이 뉘어 있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것은 그때만 살아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살아계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뜻입니다. 

 

5.4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천년전 유대땅에서만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 주님이 살아계시고, 일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지켜주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6.1 부활의 첫 증언자들인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와 막달라 마리아가 그 십자가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보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들 바로 눈앞에서 고통 속에서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6.2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안장되었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모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바위를 깎아서 만든 큰 돌무덤에 예수님을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장정 여럿이 달려들어 돌문을 옮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6.3 그들은 안식일날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안식일이 지나고 이른 아침, 장례를 위한 향품을 들고, 돌무덤이 있는 동산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신 주님의 시체라도 만져보고, 그 시체에 기름이라도 바르고 싶어서 그 무덤을 향하여 이른 새벽 걸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덤에 가까이 왔을 때, 서로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또 하나의 근심에 사로 잡혔습니다. 

7.1 ‘누가 저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문을 굴려 줄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의 무덤을 막은 돌은 너무 컸고 그들의 힘은 너무도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힘들로써는 도저히 그 돌을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장정 여럿이 움직여야 하는 그 무거운 돌을 세 여인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7.2 ‘누가 우리를 위하여 저 돌을 옮겨 줄 것인가?’라는 말은 부활절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의 걱정과 염려이자,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때에 부르짖었던 여인들만의 걱정과 염려, 두려움이 아닙니다. 

7.3 ‘누가 우리를 위하여 저 돌을 옮겨줄 것인가?’라고 걱정과 근심은, 고통과 신음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심과 걱정이었습니다. 홍해라고 하는 바다가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로마의 병거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뒤쫓아 오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그들의 출애굽을 한탄하면서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느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탄 가운데 나오는 근심과 두려움이었습니다. 

 

7.4 ‘누가 우리를 위하여 저 돌을 옮겨줄 것인가?’라고 하는 근심과 걱정은 우리 시대의 우리의 근심이자,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다고 하는 우리의 염려와 근심입니다. 이 시대의 우리 또한 똑같이 염려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내 삶에 막혀 있는 큰 돌을 누가 옮겨줄 수 있을까? 연약한 세 여인처럼, 나 자신이 약한데 내 앞에 가로막혀 있는 무거운 인생의 돌문을, 누가 옮겨 줄 수 있을까? 내 영혼과 양심을 가로막고 있는 죄의 이 무거운 돌을 누가 나를 위하여 옮겨 줄 수 있을 것인가? 

7.5 내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이웃들, 교회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 자신의 부족한 믿음 때문에, 내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성품 때문에 그들과 꽉 막혀 있는 저 무거운 돌문을 누가 옮겨 줄 것인가? 우리 개인만의 걱정과 염려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 가정이 나가고 싶은 행복 된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가로막고 있는 무거운 돌을 누가 우리를 위하여 옮겨줄 것인가?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7.6 우리 민족은 남과 북이라는 민족의 비극은 반세기 이상을 지내왔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대립과 갈등 속에서 여러 가지 통일에 대한 몸부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철로의 평행선같이 하나되지 못한 아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민족의 통일로 가는 그 길에서 가로막고 있는 무거운 돌을 우리를 위해 누가 옮겨줄 것인가? 민족적인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7.7 공통적인 문제는 누가 우리를 위해 이 돌문을 옮겨줄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약하다는 것이고, 거기에 반해 우리를 막고 있는 돌문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8.1 오늘 이 두려움과 걱정을 하며 ‘누가 우리를 위해 이 돌문을 옮겨 줄 것인가’ 염려하는 우리 모든 이들에게 주님은 해답을 주시는데, 우리가 그 돌을 옮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그 돌문을 옮겨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8.2 원래 그 돌문은 열려져야 하는 것이고, 열려져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뜻이고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돌문으로 막아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하시기 전에 미리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온전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면, 그런 걱정과 염려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8.3 이런 믿음을 갖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옮기지 않아도 그 돌문은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8.4 ‘그대여 절망이라고 말하지 말라’라는 시에서 도종환은 노래합니다. “그대여 절망이라고 말하지 말자, 그대 마음의 눈 녹지 않는 그늘 한 쪽을 , 나도 함께 아파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그대여 우리는 아직도 아픔 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 슬픔만을 말하지 말자. 돌아서면 혼자 우는 그대 눈물을 우리도 알지만, 머나먼 길 홀로 가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 않은가, 눈물로 가는 길 피 흘리며 가야 하는 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밤도 가고 있는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벗이여, 어서 고개를 들자, 머리를 흔들고 우리 서로 언 손을 잡고, 다시 일어서 가자, 그대여 아직도 절망이라고 말하지 말자.” 

8.5 혹시 건강의 문제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이른 아침 어둠컴컴한 길을 걸어가면서 나에게 막혀 있는 무거운 돌문을 열어달라고 염려하고 있습니까? 부부문제 속에서,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친척 혹은 이웃들과의 메마른 문제 때문에, 금이 가고 있는 것과 같은 문제 때문에 이른 아침 어둠컴컴한 길을 걸어가면서 나에게 막혀 있는 무거운 돌문을 열어달라고 염려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문제로 인해 잠 못자고 뒤척이다, 이른 아침 어둠컴컴한 길을 걸어가면 나에게 막혀 있는 무거운 돌문을 열어달라고 염려하고 있습니까?

 

8.6 오늘 부활절,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명쾌한 답변은, ‘걱정하지 말라’입니다. 내가 그 무거운 돌문을 열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그 길을 따라가면, 그 돌문은 열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9.1 주님이 죽음 권세 이기고 다시 사신 것을 믿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무거운 돌문의 상황 속에서 그 돌문을 열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는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새 역사의 현장인 갈릴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9.2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합니다. 처음 복음을 전하시고 사랑을 나누셨던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다시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다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9.3 우리 시대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갈릴리는 우리 삶의 구체적인 현장입니다. 우리 가정이 부활의 소식을 들어야 할 갈릴리요, 우리 일터가 우리에게 주어진 갈릴리요, 우리 살아가고 있는 지역사회가 갈릴리입니다. 남북이 분단되어 있어 여전히 진정한 평화의 땅이 되지 못한 우리 한반도가 갈릴리입니다. 

9.4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했을 때의 초심이 갈릴리요, 세상의 바르지 못한 모습을 보고 분노하며 치열한 고민을 할 때가 갈릴리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첫사랑같이 교인들과 나눔과 사랑에 감사하며 기도할 때가 갈릴리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갈릴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10.1 부활의 소식을 다시 우리 마음속에 새기면서 이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가족들이 됩시다. 

10.2 어둠과 절망 속에 있었던 내 영혼, 오늘 주님의 이름으로 부활하도록 합시다. 사랑이 메말라있었던 우리 가정이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도록 합시다. 하나되지 못하고 갈등하며 끊임없이 탐욕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가 부활의 능력으로 부활되도록 합시다. 부름받은 우리 땅에 살아있는 희망을 전하고, 진심으로 섬기려고 하는 우리교회가 부활의 능력으로 부활하도록 합시다. 

 

10.3 하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과 살아있는 능력이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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