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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부활절(1-1) - " 안식일 전날, 안식 후 첫날 " / 이순태 목사

관리자 2019-04-17 (수) 21:28 5년전 3296  

본문) 욥기 19:23-27, 고린도전서 15:1-11, 마가복음 15:42-16:8

 

1. ① 어둠이 예루살렘을 뒤덮었다. 그토록 시끄럽게 예수님에게 손가락질하며 비웃던 무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의 꿈과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예수님을 마음껏 조롱하면서 죽음의 잔치를 벌였던 자들은 꼬리를 내리고 사라져버렸다. 점차 어둠이 내려오고 모든 것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시신 처리 문제가 남았다. 당시 로마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받은 자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함로써,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범죄자는 이렇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아니었다. 우선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으신 금요일 일몰과 함께 안식일이 시작되는데, 안식일에 시신을 방치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산헤드린 공회원이자 부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당돌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였다. 자신이 장례를 치루겠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요셉에게 예수님을 시신을 넘겨 주어 장사케 하였는데, 요한복음 19:39절을 보면 그 장례식에는 또 한명의 지도자가 참여하였다. 공회원이면서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였다. 그는 장례용 향품을 가져와 장례를 도왔다. 요셉이나 니고데모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진리를 배우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던 자들이다. 그러나 둘 다 그늘 속에서만 예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공적으로 표현할 경우, 뒤따르게 될 논쟁과 결과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그들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 

 

  ②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사랑의 탁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큰 걸림돌로 간주되어 왔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진리란, 반복적으로 확인, 관찰, 검증되는 것이야 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하는 책들을 보면, 부활의 문제를 애매하게 다루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런데 예수 부활은 과학주의가 난무하는 오늘날 뿐 아니라, 과거에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문제였다. 주후 1세기에도 예수님의 죽은 몸이 살아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교인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고린도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부활을 부인하는 교인들 저변에는 희랍철학의 이원론이 들어 있었다. 이 이원론에 의하면, 영혼은 소중하고 선한 것이지만, 육체는 악하고 썩어질 것이다. 이런 철학 사조에 익숙한 고린도교인들 중 일부는 예수님이 살아난 것은 몸이 아니라, 오직 영혼만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에 대해 바울은 부활이야말로 복음의 본질적인 요소임을 강조하였다. 로마서 10: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분이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부활은 복음의 핵심요소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진리를 어떻게 알았을까? 바로 성경이다. 

 

고전 15:3절을 보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라고 되어 있고(사 53:5-6), 고전 15:4절을 보니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라고 되어 있다(호 6:2, 시 16:10-11). 즉 바울은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받아서 선포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구체적인 증인들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바울은 강조한다. 12제자들과 500여 형제들이 그 증인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 증인들이 바울 당시에도 여전히 살아 있어서, 지금이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할 사람들은 많다는 것이다. 

 

2. 그래도 죽은 자의 부활을 일상에서 받아들이기는 참 힘든 것 같다. 마가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명시적으로 자신의 부활을 언급하셨다(막 8:31, 9:31, 10:34). 그렇지만 막상 부활이 일어났을 때는 아무도, 정말 그 누구도 그것을 믿거나 기대하지 않았다. 그 결과 부활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①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안식 후 첫 날 아침 일찍 세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하였다.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서였다. 가면서 그들은 한 가지 문제로 고심하게 된다. 어떻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무덤 입구에는 아주 큰 돌이 놓여 있는데 그 돌을 어떻게 옮길지? 그런데 막상 무덤에 도착해 보니, 놀랍게도 돌이 한쪽으로 굴려져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그들의 놀라움은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더욱 커졌다. 천사로 보이는 한 청년이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이다. 여인들이 놀라자, 그 천사는 즉시 안심시킨다. “놀라지 말라” 그러면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알려 준다. “예수님께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 거기서 예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인들은 너무 놀라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부활 사건 앞에서 보이는 인간의 놀라움, 경이로움이다. 

 

  ② 사실 오늘날 현대인은 이런 놀라움, 경이로움을 격려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는 않다. 경이로움은 낯선 것에 대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건강한 아이는 자라면서 주변 세계에 대해 경이로움을 가지고 대한다. 세상은 늘 새로운 것들을 가득 안고 아이에게 다가온다. 아이는 이것을 보고 만지고 맛보며 자라왔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런데 세월의 익숙함에 길들여지면서 이런 경이로움은 서서히 무디어진다. 주변 세계에 놀라기 보다는 익숙해지게 되고, 또한 우리는 일을 통해서 환경을 장악하려 한다. 익숙함이 가져다 주는 삶의 안정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종종 번뜩이는 집회를 통해서 조금은 새로운 것을 맛보고 싶어한다. 신나는 예배, 멋진 강사나 세미나를 통해서 잠시 새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곧 다시 우리는 갈증을 느끼게 되고, 그러면 또다시 잘 포장된 영성 집회에 자신을 던진다. 그러나 부활의 경이로움을 가끔 맛보기 보다는, 일상에서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3.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가시는 곳으로 우리도 가야 한다.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부활의 놀라움과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그곳이 어디인가? 작은 자들이 있는 곳이다. 저 바닥, 낮은 곳이다. 

 

  ① 욥기 19:25절 이하에는 욥의 간절한 고백과 바램이 담겨져 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여기서 ‘대속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고엘’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빚을 지고 있거나 그것 때문에 종살이를 하는 사람을 회복시켜줄 의무를 지닌 친족을 뜻한다. 또한 무고한 죽음에 대해 대신 복수해줄 사람을 지칭할 때도 고엘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더 나아가 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는 하나님, 고난 받는 자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이 다 고엘로 묘사된다. 지금 욥은 그런 고엘을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공격에 대항해서 하늘 법정에서 욥을 옹호해줄 고엘을 바라고 있다. 그러면 그 고엘, 대속자는 누구인가? 욥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법정 논쟁을 벌이려면 그분은 하늘의 존재이어야 한다. 하나님과 구별되면서도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할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 또한 그 대속자는 욥이 죽는다고 하여도 여전히 살아 계셔서 욥의 명예를 회복시키실 분이다. 

 

그런데 언제 그 일이 일어나는가? 대속자가 땅 위에 서실 때이다. 그런데 욥기 19:25절에서 ‘땅’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 ‘아파르’이다. 흔히 땅을 언급할 때는 ‘에레츠’라는 단어가 더 일반적인데, 여기서 ‘아파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매우 의도적이다. ‘아파르’는 나귀들이 마른 땅을 지나가면서 내는 ‘흙먼지, 티끌’을 가리킨다. 그래서 같은 어근을 지닌 단어 ‘에페르’는 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욥은 몸에 악창이 났을 때 ‘재 가운데 앉아’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다(2:9). 후에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실 때, 욥은  ‘아파르(흙먼지)와 재’ 가운데 회개하였다(42:6). 이처럼 아파르라는 단어는 비천함, 낮아짐, 고난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결국 후일에 천상의 대속자가 흙먼지 위에 서신다는  말은 고난 받는 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② 복음서들을 살펴 보면 예수님의 부활에 여인들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베드로나 요한처럼 공인된 지도자들이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부활의 핵심적인 증인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특히 막달라 마리아가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그가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 뿐이다. ‘일곱 귀신’은 매우 방탕한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고, 매우 심각한 정신병을 의미할 수도 있다. 둘 중 어떤 것이든 그것은 그녀를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았을 것이다. 그런 여자가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라는 사실은,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중시하는 우리에게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주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바로 이처럼 사회에서 홀대 받는 부류, 곧 가난한 사람, 배척받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마가복음 16:7절에서 천사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대제사장을 찾지 않으셨다. 빌라도에게 가서 나 이렇게 살아났다고 알리지 않으셨다. 대신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셨다. 예수님께서 왜 부활 후 제일 먼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자고 하셨을까? 갈릴리는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처음 전파하신 곳이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갈릴리 주민들을 공공연하게 무시했다. 그 이유중 하나는 갈릴리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갈릴리 농촌과 그 주민들은 너무나도 이스라엘적이었다. 그들의 갈망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 확립되는 세상이었다. 

  갈릴리는 비옥한 땅으로, 이 지역의 농산물은 유대지방의 생명선과도 같았다. 그런데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형편을 보면, 절대 빈곤의 소농과 소작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땅의 지주들은 대부분 부재지주로서 예루살렘에 있는 왕족이나 종교 귀족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자진해서 노예가 되는 일이 속출했다. 바로 이러한 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셨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반란죄로 죽으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다시금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이다. 왜? 아직도 그곳은 치유가 필요하고, 용서가 필요하고, 위로와 안아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던 곳!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박해 당하던 곳! 그곳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들어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새롭게 펼치고자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식은 바로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③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부활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 주변부에 속한 자들, 힘들고 어려운 자들을 찾아가야 한다. 그 이유는 주님이 작은 자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회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늘진 곳으로 가서 소망과 위로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갈릴리로 가시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요, 부활의 경이로움에 동참하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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