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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2-1) - " 너희는 먼저 " / 서재경 목사 / 교회연합주일

관리자 2021-09-10 (금) 09:21 2년전 615  

본문) 렘 17:5~8, 엡 6:10~20, 마 6:25~34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


옛날에 저공이라는 사람이 원숭이들을 길렀는데, 사정이 안 좋아져서 먹이를 줄여야 했습니다. 저공은 원숭이들에게, 이제부터는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아침에 세 개라니요. 원숭이들은 펄쩍 뛰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요? 저공은 다음 날, 다시 원숭이들을 불러놓고, 심각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앞으로는 도토리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원숭이들은 만세를 부르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뻐 날뛰었답니다.

조삼모사(朝三暮四), 말 그대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이라는 말이지요. 얍삽한 속임수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이나,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이나, 결국 똑같은 일곱이지요. 그런데 원숭이만 아니라 사람도 가끔, 아니 자주, 이런 꼼수에 즐거이 당합니다. 그래서 사이비들은 이 주머니에서 빼내어 저 주머니에 넣으면서, 마치 대단한 일인 양 으스대지요. 그런 얄팍한 야바위에 침 흘리며 손뼉 칠 일 아닙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조삼모사는 꼭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밥을 먹을 때, 힘을 쓰는 사람은 아침에 든든히 넷을 먹고 저녁에 가볍게 셋을 먹는 게 좋답니다. 반면에 힘을 쓰지 않는 사람은 아침에 가볍게 셋을 먹고 저녁에 든든히 넷을 먹어도 괜찮겠지요? 뭐 아침저녁으로 알맞게 셋씩 먹고 하나는 남겨서 저를 주시면 더 좋겠지요? 그 순서를 바꾸면 같은 것도 달리 쓸 수 있습니다. 어느 것을 먼저 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때 조삼모사는 ‘꼼수’가 아니라 ‘묘수’가 되지요. 무엇보다 우리의 삶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무엇을 먼저 하느냐, 무엇을 우선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적으로 달라집니다. 어쩌면 신앙이란 ‘무엇을 먼저’ 하느냐 하는 문제 아닐까요?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있는,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이방 사람들’과 ‘너희’, 즉 말씀을 듣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서 이방 사람과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무엇을 ‘먼저’ 하는지, 그걸 보고 식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이 ‘먼저’라는 말은 그저 단순히 순서만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것은 ‘순서’의 문제라기보다는 ‘가치’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뭘 가장 우선으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 그 한 가온에, 그 中心에, 무엇을 두고 사느냐,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무엇을 먼저 구할까요? 본문 32절에,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게 뭡니까? 그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먼저’ 추구한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은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때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무참하게 무너지고 이방인들이 몰려 들어왔지요. 반면에 자기 땅을 빼앗긴 백성은 이방인의 세상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세계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섞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방 세계, 이른바 그리스-로마의 대중문화(헬레니즘)가 주도하는 세상입니다. 이 그리스-로마의 대중문화는 어떤 것일까요? 거기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거기서 사람들은 무엇을 ‘먼저’ 구할까요?

헤롯은 헬레니즘 신봉자였습니다. 그를 보면 헬레니즘 대중문화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헤롯은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라 이두매 혈통이 섞인 자입니다. 그는 나라가 혼란한 때 일찌감치 로마로 도망가서 정세를 살피다가, 뼛속까지 친 로마인으로 변신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환심을 샀습니다. 당연히 엄청난 뇌물을 바쳤지요. 그 대가로 그는 분봉 왕이 되어 금의환향했습니다. 이런 약삭빠른 처세술을 세상은 ‘지혜’라 하지요. 그는 헬레니즘의 전도사답게 로마를 모방한 신도시들을 개발하고, 성전도 헬레니즘 양식으로 건설했습니다. 물론 목욕탕과 경기장도 많이 만들었지요.

헤롯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는 무엇보다 ‘연회’를 좋아했습니다. 로마 귀족들이 껌벅하는 것인데, 헤롯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들에게 연회란 자신의 존재를 만끽하고 과시하는 방편이었습니다. 왜 황제는 콜로세움에 군중을 불러놓고, 무희들에 둘러싸여 비스듬히 누워서, 느끼한 연회를 즐기지 않습니까? 요즘에도 별들이 반짝이는 호텔에서 무슨 밍크코트를 입고 별세의 연회를 만끽한다는 얼치기 짝퉁들이 있다지요? 헤롯과 예루살렘 벼락 귀족들은 그런 연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흥이 오르면 남의 목도 걸었지요.

그런 연회의 품격은 무엇이 결정할까요? 그 첫째는 옷발입니다. 화려한 옷, 당연히 비싼 옷입니다. 왜 연미복을 날렵하게 빼 줘야 제비처럼 보일 거 아닙니까? 사람들은 그들의 비싼 옷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가 대단하다는 걸 대뜸 알아주니까, 신분을 과시하는 데는 옷보다 좋은 게 없지요. 로마에서 온통 보라색 핏빛으로 휘두르고 나타나는 자를 보면, 모든 사람이 땅에 엎드리듯이 말입니다. 연회에서는 옷이, ‘입는 것’이 중요합니다. 

옷 다음으로 연회의 격조를 높이는 것은 또 뭘까요? 뭐니 뭐니 해도 연회 하면 ‘음식’이지요.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뽐내도, 음식이 별로면 그 연회는 완전히 꽝 아닙니까? 왜,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지 않습니까? 연회는 곧 음식이고, ‘먹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특별한 음식, 진기하고 기발한 요리가 좋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술이 좋아야 합니다. 무지하게 비싸야 합니다. 그래야 인상에 깊이 남을 테니까요. 저들은 온갖 기름진 음식으로 배가 꽉 차면, 그걸 다시 격조 있게 금쟁반에 토해내고 다시 먹어댔습니다. 아주, 먹고 마시고 입는 데 환장한 자들 아닙니까? 물론 특별하게, 귀족의 품격에 맞게! 

이제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하신 말씀이 무엇을 겨냥하는지 분명해졌지요? 그것은 저 헤롯과 이방인들이 벌이는 쾌락의 난장을 정조준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먼저’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먼저’ 하는 사람들일까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음속 깊이, 우리 삶의 中心에 새겨야 할 말씀이지요. 그리스도인은,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향해 살아야 한다, 그 말씀입니다. 그렇지요.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언제나 뭘 먹을지 어디서 마실지 어떻게 입을지 하는 데만 몰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일까요? 그는 이방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있는데,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는 누구일까요?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떻습니까? 참 쉽지요?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기도하면 산다고 해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무시하고 회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일을 오히려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적대자들에게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고 비난받기도 했지요. 예수님은 실제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한 상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예수님은 저 헤롯 같은 이방인의 연회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잔치에는 기꺼이 참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문제는 무엇이 ‘먼저’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먹고 마시고 입을까요?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고,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지키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더 중요한 것은 음식과 옷이 아니라 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음식과 옷이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약하게 하고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습니까? 무엇보다 우리의 음식과 옷이 우리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폭력적으로 위협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요즘 과학자들이 지구의 생태계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경고합니다. 코로나는 그 징후의 하나일 뿐이랍니다. 이제는 기후변화라고 하지 않고 ‘기후위기’라고 말하지요.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가 목이 터지라고 외쳤던 대로, 도끼가 이미 나무의 뿌리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후위기’는 누가 어디서 만드는 걸까요? 그 원인을 따라가면 어디에 이를까요? 인간의 ‘폭력적인 밥상’에 이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먼저인’ 인간의 문명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먹고 또 먹어대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까지 먹어치웠다는 에리직톤의 비극이 신화 속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정말 무엇이 ‘먼저’인지 무엇이 중요한지, 빨리 정신 차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셨지요. 들에 핀 꽃을 보라 하셨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 말씀을 그저 아무 걱정 없는 아이처럼 유유자적하라는 말씀으로 듣기도 했지요. 그런데 진짜 공중 나는 새들은 한 번 보세요. 새들은 마냥 유유자적하는 게 아닙니다. 이른 아침 재잘거리는 새들은 얼마나 부지런합니까? 새들이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정성스러운지요. 또 가을 들녘에 여기저기 피는 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향기롭고 아름다운 작은 들꽃들은 또 얼마나 치열한지요. 그 메마른 돌 틈에서도,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아주 작고 예쁜 꽃을 참 정교하게 피워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새들과 꽃들은 지금, 치열하고 정성스럽게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순리를 고스란히 따릅니다. 그래서 정말 자유롭게, 너무도 아름답게, 그대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 안에 살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무엇보다 자연을 닮은 사람입니다. 당연하지요. 자연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하나님이 운행하시지 않습니까? 예레미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 같다고 했습니다. 시편 시인도 그렇게 노래했지요. 물가로 뿌리를 내려서 언제나 싱그럽고 푸른 나무 같은 사람,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으며 언제나 철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사람! 그가 누굽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덥고 습한 여름이 언제였냐는 듯, 맑고 푸른 가을이 열렸습니다. 온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는 절기지요. 답답하지만 그래도 틈을 내어 자연으로 나가서 공중에 나는 새를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저기 피어나는 작은 들꽃도 가만히 들여다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자연의 순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따라,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감싸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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