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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7-2) - " 주께서 주신 능력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자 " / 이영재 목사

관리자 2018-10-14 (일) 09:32 5년전 4618  

본문) 창9:1-7, 벧전4:1-11, 마25:14-30

 

오늘 창조절 일곱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온통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시멘트 회백색의 빌딩으로 숨막히는 도시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거기에는 논밭에 오곡이 무르익고 황금빛 들판이 펼쳐지며 온 산에는 단풍이 화려하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결실과 수확의 계절에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의 비유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달란트를 맡기시고 우리가 무엇을 결실하였는지 살피시고 그것을 수확하려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의 말씀을 증언하는 중에 성도 여러분 각자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고 내게 무슨 결실이 있는지 스스로 성찰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마태복음서 25장에서 주신 달란트의 비유도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이와 같다고 하신 마25:1 말씀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래서 24절을 새번역 성경은 또 하늘 나라는 이와 같다.란 말씀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멀리 여행을 떠나면서 세 명의 종들에게 재산을 맡기며 사업을 하여 남기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주인이 맡길 때 각 종들이 지닌 능력을 고려하여 그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주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일을 맡기실 때 우리 각자가 지닌 능력대로 일을 맡기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종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겼고, 또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맡겼으며, 세 번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달란트는 로마시대에 금액을 계산하는 단위였습니다. 로마제국이 세금을 거두어갈 때 달란트라는 단위로 금액을 계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던 시대에 달란트는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었습니다. 또 화폐로 유통되던 작은 단위의 금액은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데나리온은 당시 유대인들의 노동자가 받는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1 달란트는 대략 6,000 데나리온었으니 노동자의 임금을 빗대어서 그 액수가 얼마였는지 현대의 가치로 환산해 볼 수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최저임금을 제시하여 많은 논란이 일었습니다. 최저임금은 박근혜 정부 때 보다 16.4%를 올려서 2018년 최저임금이 시급 7,530원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월급이 최저임금 시급 7,530원에, 하루 노동 8시간 기준으로 일급은 60,240원이 되고, 주 소정 노동 40시간 기준으로 월급은 1,573,770원이 됩니다. 이 월급은 이전 보다 221,540원이 인상된 금액입니다. (월 환산액은 주 소정 근로 40시간을 근무한 경우 월 환산 기준시간 209시간으로 주당 유급주휴 8시간을 포함한 경우이다).


오늘날 노동자가 받는 하루 품삯을 6만원이라고 계산할 경우에 6000데나리온 × 6만원 = 3 6천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오늘 날 원화로 1 달란트를 환산하면 3 6천만원의 가치가 됩니다. 한 달란트는 엄청난 금액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계산법도 있습니다. 금의 가치로 환산하는 방법입니다. 달란트가 로마시대에 금 34kg에 해당한다 합니다. 그것을 오늘의 금값으로 환산하면 요즈음 금 1g 44,391.5원이므로 이것에 34,000g 15억이란 엄청난 거액이 나옵니다. 임금으로 계산한 경우와 금의 가치로 환산한 경우는 약 4.5배 차이가 나지만 지금 우리는 노동자의 임금에 따른 환산법을 따라 말씀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금 다섯 달란트를 위탁받은 종은 18억원을 받은 셈입니다. 한 달란트 3 6천만원에 5 달란트를 곱하면 18억원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두 달란트 위탁받았으니 그 금액은 7 2천만원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오늘 비유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3 6천만원을 받았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지금까지 흔히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참으로 풍성하고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설교에 인용되어왔습니다. 그래서 많이 남긴 종에게 초점을 맞추어 충성된 종과 같이 성실하게 봉사하라는 말씀으로 설교하였습니다. 아무리 적게 맡은 종이라도 충성을 다 하면 칭찬받는다는 메시지를 선포해 왔습니다. 교회의 신자들이 교회의 일에 충성을 다 해야 한다는 요지로 이 달란트 비유는 중요한 교육 자료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더 깊이 묵상해야 할 주제는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감하시고 체포를 당하시기 직전에 베푸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고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신 데 이어서 성전이 곧 무너질 것을 내다보시며 한탄하셨습니다(22-24). 그러한 상황에서 주의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24:3). 이 답변 가운데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주께서 세 가지 말씀을 베푸셨는데 25:1-13열 처녀의 비유”, 25:14-30에는 달란트의 비유”, 25:31 이하에서는 최후심판의 비유를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직전에 베푸신 종말에 관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을 받을 때 일어날 일들을 주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게으르고 악한 종이 당하는 징벌을 묘사함으로써 제자들이 늘 깨어서 일하도록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데 예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고를 베드로 사도는 마음에 깊이 새겨 두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베드로도 성도들에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라고 심판을 경고하곤 했습니다(벧전4:7). 게으른 종은 정신을 차리지 않았고 근신하여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기도하며 깨어있는 종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합니다. 깨어있는 종들은 말씀을 들은 그 즉시 나가서 실천했습니다. 그 즉시 나가서 일했다는 말은 주께서 맡기신 사명에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가기는 갔으되(7), 곧 의심이 생겨서 땅을 파고 그 한 달란트를 묻어 두었습니다. 이 종은 주인을 원망하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오해로부터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일에 대한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말씀공부와 기도에 힘쓰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게으른 종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 오해했습니다(마25:24). 그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의 권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는 능력이 주님께 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으나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편견과 선입관념에 치우쳐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지 못했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이 무서워서 한 달란트를 고스란히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왔던 것입니다. 행여 사업에 실패하여 손해라도 보면 벌을 받을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하는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시고 세운 백성들을 존귀한 자로 여기시고 드높이십니다(16:3).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보살피고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16:5). 우리의 살 길은 하나님께 있음을 우리는 항상 고백하며 삽니다(16:11).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자는 무슨 일이든지 믿음으로 행하며 그 결과는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상을 살아가는 성도가 품어야 할 믿음입니다. 여기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성서에는 창조신앙을 힘차게 증언하는 고백이 가득합니다. 노아 시대에 큰 홍수 심판이 있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어 자기 식구들과 동물들을 태움으로써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가 방주에서 나오던 날 구원하신 주님을 경배하여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감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고백에서 나옵니다.


감사예배를 드리는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약속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9장 1절과 7절에 동일한 말씀으로 두 차례나 연거푸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리라고 확약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은 이와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항상 자기를 찾는 백성에게는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온 악하고 게으른 종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전혀 알지도 못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감사를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고 감사의 예물을 드릴 자세도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과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은 주께서 오실 그 날에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남긴 것들을 감사의 예물로 가져올 수가 있었습니다. 장사하여 남긴 것은 자기의 소유가 아닙니다. 주께서 각각의 생명에게 주신 능력을 표현입니다. 주님에게는 어떠한 소유의 관념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충성된 종에게는 사적 소유의 관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장사하여 남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주님의 사랑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게으르고 악한 종은 돈의 많고 적음에 집착하였고 자기 동류들의 능력과 비교하는 가운데 자신의 작은 능력이 지닌 고귀한 가치를 폄하하였습니다. 작은 능력자도 있어야 모든 일이 조화롭게 성사된다는 사실을 그는 몰랐던 것입니다. 주께서는 사적 소유를 위하여 일하라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 악한 종은 장사의 결과 남길 소득에만 생각을 관심을 쏟았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께서 맡기신 사명이 사랑의 사역임을 누누이 강조하였습니다.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4:8-11).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달란트는 성도에게 주어진 사랑을 실천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곧 사랑이기에 말씀을 실천하는 능력은 곧 사랑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오랜 후에주인이 왔다고 합니다(μετ πολν χρνον, 25:19). 누가복음서 19장에도 므나의 비유가 나오는데 마태복음과 동일한 종말론의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거기에는 더 자세히 당시 상황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19:11).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제자들은 조급히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은 오랜 후에 예수께서 재림하여 심판할 때 완성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받은 사랑의 달란트를 가지고 말씀을 실천하며 달란트를 남기는 일은 너무나 힘겹고 어렵습니다.


누가복음서의 므나 비유는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 이야기 다음에 베푸신 말씀입니다. 삭개오는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말씀을 따라 사는 삶으로 회개하고 전향하였습니다. 삭개오의 집에서 들어가셔서 므나의 비유를 베푸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1 므나를 맡기고 떠났는데 어떤 종은 10므나를, 어떤 종은 5므나를 남겼습니다(19:11-27).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와는 사뭇 다릅니다. 므나는 달란트에 비하면 아주 작은 금액입니다. 1달란트는 16.4년치 임금에 해당하는 반면, 한 므나는 석 달치 임금에 해당합니다. 한 므나는 대충 5백만원 정도 됩니다. 액수의 차이는 크지만 므나의 비유도 달란트의 비유와 같이 종말론의 문맥에 놓여서 악한 종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무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경고는 마태복음서 24 44절에 뚜렷하게 나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베드로 사도도 이와 같은 경고를 수시로 베풀었습니다. 신실한 종과 신실하지 않은 종은 종말의 심판 때에 판가름이 납니다. 그 판단의 기준은 사랑의 실천 유무에 있습니다. 악한 종은 동료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셨습니다(마24:34). 폭력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달란트의 비유를 베드로 사도가 베푸신 엄중한 심판의 경고에 빗대어 묵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과는 더욱 깊은 뜻이 말씀에서 베어나옵니다. 성도 여러분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각자의 분량대로 받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받은 존귀한 성도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오곡이 무르익는 이 창조의 계절에 다시 한 번 경각심을 갖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기 위하여 말씀공부에 힘쓰며, 기도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귀한 하나님의 능력을 바르게 인정하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감사의 풍성한 열매를 주님께 바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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